거제 위령탑

통영 민간인 학살 사건을 말한다⑤

타 시도에서는 가족대로 배상받아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잘못된 과거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이하 진화위)’가 구성됐다. 진화위는 2010년까지 5년간 독립적 국가기관으로 활동하다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해산됐다.

1기 진화위에서 가장 많이 다룬 사건이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각 지역별로 신청자를 중심으로 한 진상조사가 이루어졌는데, 통영·거제 지역에서는 “1947년 8월부터 1950년 9월까지 통영지역에서는 900여 명, 거제지역에서는 800여 명이 부역혐의와 국민보도연맹원 또는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경찰과 국군에 집단 희생됐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들 중 통영 54명, 거제 119명이 희생자로 확인‧추정됐다.

당시 진화위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국가가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국민을 집단살해하고 그 유족들을 고통 속에 살게 한 것은 잘못”이라면서 “국가가 정중하게 사과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에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공식적으로 민간인 학살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했으며, 각 지자체에서도 희생자 추모 행사시에 군부대장이나 경찰서장이 참여해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 그러나 통영은 공식적인 추모행사도 없었고 사과도 없었다.

1기 진화위는 공식사과와 함께 “희생자에 대한 위령제 봉행, 위령비 건립 등 위령사업을 진행할 것”과 역사기록의 수정 및 등재, 유해 발굴 방안 지원 등을 권고했다.

이 권고에 따라 당시 국방부에서는 각 유족회에 위령제 비용을 지급했다. 그러나 통영은 위령제를 수행할 유족회가 없어 반납했다. 경남유족회 노치수 회장은 “2009년 당시 국방부에서 200~300만원씩 내려왔다.”면서 “경남유족회에서 통영에 가서 위령제를 지내겠다고 했지만 그런 방법으로 하면 안 된다고 해서 할 수 없이 반납하게 됐다.”고 말했다.

통영과 고성을 제외한 경남의 다른 지역은 2010년에 위령제를 지냈다. 유족회의 활동이 활발한 마산의 경우, 지자체의 지원까지 받아 성대하게 치렀다.

이후 각 지역의 유족회들은 국가를 대상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해 배상금을 받았다. 2011년 울산보도연맹 희생자 유족에 대해 배상 판결이 난 것을 시작으로, 국가는 전쟁당시 민간인 희생자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한편, 위로금을 지급하는 판결을 속속 내렸다. 배상액은 피해 당사자 8~9천만원, 배우자 4~5천만원, 자녀는 800~1천만원이다.

진주유족회 정연조 회장은 “진주, 의령, 함안, 창녕, 양산, 창원, 거제 등 소송한 곳에서는 거의 다 보상을 받았다.”면서 “억울한 생목숨 값이 8천만원, 평생 빨갱이 자식 소리 들으며 불이익을 받아온 값이 800만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국가가 주는 위로금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족회가 없는 통영은 마산유족회에 포함돼 6명, 거제 유족회에 포함돼 8명이 보상을 받았을 뿐이다.


첫걸음은 유족회 결성

지금 민간인학살 사건을 다시 돌아보는 이유는 제2기 진화위가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부터 공식 활동을 시작한 2기 진화위는 2022년 12월 9일까지 진실규명 신청을 할 수 있다. 조사기간은 3년이며 이후 1년 연장할 수 있다.

진실규명 신청은 주소지와 상관없이 가까운 시도 및 시군구에서 할 수 있다. 사건이 접수되면 진화위에서는 90일 이내에 전체 위원회를 열고 조사를 개시를 결정한다.

2기 진화위는 지난 5월 27일 328건, 6월 18일 334건을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조사를 한 다음에는 희생자로 ‘확인’하거나 ‘추정’한다.

진실규명에서 ‘확인’을 받았다고 하여 저절로 국가가 배상해 주는 것은 아니다.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해야 하는데 개인이 앞으로의 재판을 감당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후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유족회가 있어 함께 움직여야 한다.

그동안 통영에서 유족회를 만들어보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결국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노치수 경남유족회장은 “통영이 보수색이 강하고, 학살에 가담한 가해자들이 늦게까지 통영에 살다 보니 유족이 활동을 못하는 아주 특이한 상황이었다.”고 말한다.

통영은 아직도 민간인 학살 사건을 말할 수 없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지난 6월 조사개시된 334건만 봐도 고창군 116건, 청원.괴산 108건, 경주 64건이 포함돼 있건만 통영은 현재 단1건이 신청 접수됐을 뿐이다.

바로잡지 않은 역사는 반복된다. 지금이라도 잘못 기록된 역사를 바로잡고, 억울한 세월에 대한 보상과 화해가 이루어져야 한다. 명정동과 무지기고개 학살현장은 지금이라도 흙만 얼마 걷어내면 유골을 만날 수 있을 텐데, 기초조사라도 이루어져야 한다.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이사

지역신문이 써야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다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이사는 오랫동안 전쟁전후 민간인 학살을 조사해 왔다. 지역신문 기자를 하면서, ‘서울을 중심으로 한 역사가 아닌 지역의 역사를 써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지역의 현대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9년에 시작했는데, 그때는 시골마을에 가면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어요. 전쟁 일어난 지 50년 뒤니까,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지요.”

도심을 벗어나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시골 마을로 가면 대를 이어 마을을 지키고 사는 사람들을 만나기 마련이다. 노인들을 취재하면서 전혀 기록되지도, 회자되지도 않은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고한 인명이 수백 명에서 천 명이 넘도록 죽었는데, 왜 이렇게 모르고 있었을까? 한 마을의 일인 줄 알았는데, 캐다보니 똑같은 집단학살이 경남도내 전체, 아니 남한 전체에서 이루어졌다.

경남도민일보는 시리즈로 경남에서 일어난 민간인학살사건을 보도했다.

“그러다보니 비슷한 취재를 하는 다른 기자, 사회운동가들, 역사학자 들과 연결이 됐지요.”

2000년에 전국 단위의 진상규명 운동단체가 설립됐다. 2001년에는 ‘50년의 침묵, 50년의 통한, 이제는 말해야 한다’는 슬로건을 걸고 경남지역 민간인학살 유족 증언대회를 열었다. 그동안 취재를 해왔던 100여 명의 유족과 시민이 참여했다.

“니도 그런 일을 겪었나? 내도 그런 일을 겪었다.”

증언대회는 눈물바다가 됐고, 자연스럽게 유족회가 결성됐다. 민간인 학살 문제가 공론회 되면서 양심적인 변호사와 법조인들이 합류해서 같이 하게 됐다. 이들이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통합특별법을 법안’을 만들면서 진실화해위원회가 만들어지는 기초가 됐다.

“통영신문이 계속 말해 주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죽었는데도 빨갱이 자식이 될까봐 통영을 떠나거나 숨죽이며 사는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해 주어야 합니다.”

가족이나 친척 중에 희생자가 있다면

각 지자체 시청이나 구청의 자치행정과 ‘진실규명 담당자’에게 진실규명을 신청한다.

통영의 경우 시청 행정과(055-650-4035)에서 접수를 받고 있다.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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