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김철호는 왜 바다에 수장됐을까?
독립운동가 김철호는 왜 바다에 수장됐을까?
  • 김선정 기자
  • 승인 2021.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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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시청 앞 작은 언덕에 있는 ‘애국지사 국한(國汗) 김철호 선생 공적비’

통영 민간인학살 사건을 말한다①

통영시청 앞 공적비의 주인공 김철호 선생

통영시청 앞 작은 언덕에는 ‘애국지사 국한(國汗) 김철호 선생 공적비’가 서 있다. 공적비 안내판에는 김철호 선생이 일제시대 때 의열단원으로 항일독립운동을 했으며 신간회 통영지회 총무간사를 지낸 이력이 쓰여 있다.

김철호 선생은 1928년 6월 중국에서 열린 의열단 중앙앙집행위원 서응호의 귀국 박람회를 기회로 일대 거사를 계획했다가 체포돼 1929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분명한 기록으로 나와 있는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김철호 선생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그러나 김철호 선생에게 독립운동가의 훈장을 내린 국가는, 서훈 45년 전인 1950년에 그를 한산도 앞바다에 빠뜨려 죽였다. 나이 50세, 일제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반민특위 위원으로 활동한 직후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김철호 선생은 6·25 당시 통영읍장을 지낸 김채호 선생의 친동생이다. 친형이 통영읍장이었는데도 김철호 선생은 왜 국가의 손에 죽은 것일까?

김채호 읍장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통영 사람들이 많다. 김채호 읍장의 큰아들인 김용식 씨(큰조카)는 당시 호놀룰루 총영사였다. 백범 김구의 변호를 맡아 통영사람에게 유명했던 김용식 씨는 이후 30여년간 한국의 외교관으로 활약하며 UN대사, 주미 대사 등을 역임하고 외무부 장관을 지내게 된다.

김채호 읍장의 작은아들은 통영이 자랑하는 문학가 김용익이다. ‘한국의 알퐁스도데’라고 불리는 김용익 선생은 1948년 미국으로 건너가 영어로 동화를 썼다. 그의 작품 ‘꽃신’이나 ‘푸른 씨앗’은 덴마크와 미국 교과서에 수록됐고, 1966년 독일우수도서 선정, 1967년 오스트리아 청소년명예상 등을 수상하며 해외에 한국을 알리게 된다.

김채호 읍장이 살던 태평동의 생가는 지난 2013년부터 ‘김용식·김용익 기념관’으로 리모델링돼, 통영의 자랑 중 하나가 되었다.

일제가 물러간 뒤 김철호 선생은 일본에 부역한 사람을 찾아내는 반민특위 조사관으로 활동했다. 6·25 당시 그는 네 자녀를 둔 가장이었다.

김철호 선생을 기억하고 있는 노인들은 “참 사람이 점잖았다.”고 증언했다.


김철호 선생과 아들 김용민(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경남유족회 제공)<br>
김철호 선생과 아들 김용민(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경남유족회 제공)

1950년 8월 14일 늦은 밤

1950년 8월,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고 있었고, 통영은 오늘이나 내일 당장 들이닥칠지 모르는 인민군 소식을 들으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14일 밤 자정이 가까운 시간, 김철호 선생은 잠을 자다가 어떤 사람들에게 잡혀갔다. 지금 88세가 된 큰아들 김용민 선생은 그날 밤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큰아버지(김채호 읍장)랑 읍 직원들은 계엄사령부의 지시를 받아 배를 띄워놓고 통영에 댔다가 바다로 나갔다가 하면서 선상 피난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14일날 통영에 배를 대서 읍소 직원들도 집으로 자러 가고, 아버지랑 내랑 누님도 토성고개 집으로 자러 갔어요. 어머니는 일곱 살, 네 살 된 동생들 데리고 용호리로 피난을 가 있었고요. 그런데 갑자기 밤 11시나 넘어가 대여섯 명이 집으로 들이닥쳐서는 아버지를 끌고 갔어요. 아버지가 맨발로 끌려가니까 무서워가 그 집에 있을 수 있습니까? 큰아버지 있는 배로 갔지요.”

지금 한산호텔이 있는 일대에 해무청 충무출장소와 해산회사창고가 있었다. 헌병대는 그 창고를 유치장으로 사용했는데, 당시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 갇혀 있었다.

“거기에 사무실이 있고 뒤에는 메루치 창고가 있었어요. 사람들을 창고에 가돠놓고 사무실에서 고문을 하는 기라요. 우리가 탄 배가 길을 사이에 두고 바다에 떠 있었는데, 밤중에 울부짖는 소리가 안 들릴 수 있습니까? 큰어머니랑 배에 앉아가, 아버지가 ‘다리야’ 하고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지요.”

그 후 김용민 선생은 더 이상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한산도 앞바다에 끌고가 수장시켰다더라 하는 소문만 무성했다.


한산도 앞바다에 수장된 사람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 정부는 “남쪽에 있는 좌익세력들이 인민군에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만으로 보도연맹원 사살 명령을 내렸다. 보도연맹은 “좌익에서 전향한 사람을 ‘보호’하고 ‘지도’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만든 조직이다. 그러나 조직 확장 과정에서 좌익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가입하게 됐다.

인민군이 내려오기도 전에, 군인과 경찰은 보도연맹원을 끌어다 총살하거나 수장했다. 통영에는 당시 보도연맹원이 300여 명 있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좌익과 아무런 관련 없는 농부나 학생들이었다.

김철호 선생처럼 보도연맹에 가입되지 않은 독립운동가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인민군이 점령했다 회복한 다음에는 ‘밥해 주었다고, 방공호를 파 주었다고’ 사람들을 죽였다. 통영의 경우, 안정리와 도산면 주민들의 피해가 컸다. 낮에는 국군이 시키는 일을 하고, 밤에는 인민군이 시키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무고한 양민이 ‘부역자’ 혐의를 받고 총살되거나 수장됐다.

지난 2009년,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김철호 선생과 같은 시기에 죽은 통영지역 민간인학살 피해자가 “915명 이상”일 것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바다뿐 아니라 일부는 명정동 절골에서, 일부는 안정 무지기고개에서 학살됐다.

70년 전 그때, 통영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88세 노인이 된 아들 김용민 선생(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경남유족회 제공)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