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마을 최경락 이장이 아스콘 공장 뒤 학살지를 가리키고 있다.

통영 민간인 학살 사건을 말한다②

“그 사람들이 무슨 대단한 사상이 있었던 기 아이라. 무슨 쪼그만 연줄이라도 있으면 모두 보도연맹에 가입시겨가, 그래 죽였다 아이가.” -죽림 홍성대(87세)

“보도연맹 사건은 엄연한 민간인 살인사건인기라. 조금이라도 관련이 돼 있는 사람을 억압을 넣어가지고 강제로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만들었다 아이가. 그래놓고 인민군이 온다카니까 싹 모다가지고 죽여삔 거라. 지 구덕을 파게 해서, 한꺼번에 앉히놓고 ‘다라라라’ 해삤다 아이가.”-안정 조갑제(87세)

“무지기재에서 죽은 사람들은 좌파가 아이라. 좀 똑똑고, 말 잘하고 한 사람들을 잡아다 죽인 기라. 사상이 뚜렷하고 공산주의 활동을 한 사람들은 미리 다 잽혀가거나 산에 숨어 살았다.” -안정 정근주(82세)

안정 무지기고개 학살지에는
아스콘 공장이 들어섰다.(화살표 부근이 희생지)

통영에 인민군이 들어오기 직전, 군과 경찰은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을 모아 안정 무지기고개에서 죽였다. 2009년 1기 진실화해위원회(이하 진화위)는 “1950년 7월 25일경, 인민군이 경남지역으로 진입하려하자, 통영경찰서, 특무대(CIC), 해군 G-2, 헌병대 등이 통영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을 미리 잡아들여 통영경찰서 유치장에 감금한 다음, 7월 26일 안정리 무지기고개에서 총살했다.”고 밝혔다.

보도연맹에 대한 소집은 7월 중순경부터 있었다. 보통은 경찰서 사찰계의 소집 통보를 받고 통영극장이나 봉래극장의 시국 강연회에 참석한 뒤 통영경찰서로 연행됐다고 한다. 개별적으로 연행돼 경찰서로 간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이 경찰서에 잡혀 있는 동안 가족들은 갇힌 이들을 꺼내기 위해 뒷돈을 주기도 했다. 당시 거래된 뒷돈은 30만원 정도였다.

경찰서에 구금된 보도연맹원들은 트럭에 실려 안정리 무지기고개로 실려 가 총살을 당했다.

1기 진화위 때 증언자였던 故김기부 씨는 “구덩이가 다섯 개 있었고, 한 구덩이에 50명정도씩 있었다.”고 증언했다. 당시 아버지 김세곤(당시 44세) 씨도 희생되었기 때문에, 김기부 씨는 손으로 구덩이를 후비며 시신을 찾았다고 말했다.

“그때는 다 미쳤었어. 냄새는 나는데, 위에만 흙으로 덮어놨지, 밑에는 멸치 잡아서 창고에 재듯이 딱 그래놨는기라. 그렇게 하는 데가 어디에 있습니까?”

당시 중학생이었던 조갑제(87세) 씨는 “사람들을 끌어가 구덕을 파게 하고 위에서 총을 쐈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구덕을 팔 때는 자기가 죽을 구덕인 줄 몰랐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1기 진화위는 “무지기고개에서는 7월 26일과 27일에 총살이 있었다.”면서 “110명~250명이 희생되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 외 장자도 금굴을 비롯한 통영과 인근지역에서 또 다른 국민보도연맹사건이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더 이상 확인되지 않았다.”고 썼다.

맞은편 삼정레미콘 공장 뒤에는 주민들이 일부 주검을 옮겨 묻어 공동묘지가 형성됐다.

문제는 국민보도연맹 사건이 어쩔 수 없는 희생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이승만 정부는 “좌익 전향자들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면서 보도연맹을 결성해 놓고, 6.25가 일어나자 ‘북에 협력할지 모른다’는 우려만으로 그들을 살상했다. 보호하고 인도하겠다던 보도연맹의 명단이 ‘살생부’로 바뀐 것이다.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 가운데 실제 좌파 단체에서 활동한 사람은 20%밖에 안 된다. 처음에는 좌익 단체활동을 했던 사람들을 가입시킨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통일 정부를 바랐던 중도파나 우파정당(한국독립당), 미군철수를 주장한 소장파 국회의원들을 전면적으로 탄압하기 위해 반강제적으로 가입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통영처럼 중앙 정치에서 먼 지방에서는 공무원들이 실적을 높이기 위해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쌀, 식량 등을 배급해준다”고 선전해 가입하기도 했다. 1기 진화위 때 진실이 규명된 안정사 스님 장정금은 “가입하면 여러 가지 혜택이 있다는 친구의 권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고 한다.

이런 적극적인 가입 권유로 1949년 말에는 보도연맹 가입자 수가 전국적으로 30만 명에 달했다. 통영의 경우, 경남지부보다 먼저 보도연맹이 결성되었으며 연맹원은 300여 명에 달한다. 이들 중 상당수가 ‘무엇을 준다고 하니 가입했다’는 것이 남은 이들의 증언이다.

학살 뒤 10년이 지난 1960년, 국회에서는 “통영 지역 보도연맹 학살 피해자는 200여 명”이 될 것으로 파악했다.

자형이 희생되었다는 정근주 할아버지가
진화위에서 조사한 명단을 살피고 있다.

농사짓던 자형, 형제 때문에 보도연맹 가입돼 죽었다

정근주(82)

나랑 좀 나이 차이가 나는 누님이 왜정시대에 위안부 안 끌려갈라고 16살에 결혼을 안 했나. 바로 옆집으로 시집 보냈지. 우리 자형이 3형제 막내였는데, 위로 형 둘이 좌익사상을 가지고 있었는 기라. 막내인 우리 자형은 배운 기도 없고 그냥 농사짓는 사람이라.

형 둘은 어디로 갔는지 없는데, 자형을 끌어다 무기지재에서 죽여삤지.

무지기재에서 죽은 사람들은 진짜 사상 가진 사람들이 아이라. 이미 활동을 많이 하고 사상이 있는 사람들은 그 전에 잽히가고, 산에 숨어 살았어.

보도연맹 결성할 때, 사상 있는 사람의 친척들, 친구들, 같이 조금이라도 움직인 사람들을 가입시킨 기라. 농사짓고 그런 사람들이지. 우리 자형도 형들이 그렇다 해서 보도연맹에 가입된 기지.

(옆에 있던 다른 할아버지: 여서 보도연맹 가입한 사람들은 전부 뭐 준다고 해서 가입한 거지, 사상 알아서 가입한 사람 없다.)

보도연맹 사람들이 인민군 내려오면 합세할 끼라고 보고 미리 죽여삤다.

우리 마을이 원래 가스공사 있는 데 있었는데, 그 마을 안에서만 여섯 명, 여기 마을에서도 한 세 명, 무지기재에서 죽은 사람만 그렇다. 경찰서 가서 죽은 사람, 괴뢰군에 죽은 사람 빼고.

괴뢰군 내려와서는 공무원이나 지방 유지들이 잽히가가 욕봤다. 괴뢰군 본부가 양조장에 주둔하고 있었거든. 저녁쯤 되면 사람을 때리는 소리가 들리는 기라. 첨에는 “으악!” 하는 비명소리가 선명하게 들리거든. 조금 있으면 그 목소리가 쉰 신음처럼, 똑 개 잡을 때 숨 끊어지는 식으로 들리는 기야. 그러면 “아, 누가 또 죽는구나.” 하고 알았지. 그때 인민군에게 협조한 사람도 있었거든. 할 수 없이 밥해 준 사람도 있었고.

인민군이 왔다가 물러간 다음에는 경찰들이 와서, 협조한 사람이랑 밥해준 사람을 모두 노산 양곡창고로 잡아가는 기야. 많이 잽히갔지. 이리 잽히고, 저리 잽히고.

우리 아버지도 사위가 보도연맹 했다 그래가 경찰에 잽히갔지. 5일인가 일주일인가 있다가 풀려나왔는데, 그때 잽힌 사람이 하도 많아가, 변소 위에서 자고 그랬다 하더만.

지금은 아무도 없다. 모두 죽고 이사 가고.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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