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멸치창고에서 일어난 일을 다룬 동아일보 통영기사

통영 민간인 학살 사건을 말한다③

한산도 앞 수장과 명정동 공개총살 810여 명

“죄없는 양민들을 잡아다가 창고에 감금하고는 남녀 할 것 없이 옷을 벗게 하고 그들을 강제로 정교를 맺도록 명령하고는 몽둥이로 난타한 후 20명 내지 40명씩 ‘로프’로 묶어 큰 돌을 달아 바닷물에 던져 수장하였다. 물위에 떠오른 사람들에게는 총을 쏘아 죽였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 같은 장면이지만 이 기사는 70여 년 전 통영에서 일어난 일을 다룬 동아일보 기사다. 양민을 감금했다는 창고는 현재 한산호텔 자리에 있었던 항남동 멸치창고다.

학살의 당사자인 이승만 정부가 4.19혁명으로 물러난 뒤, 전국적으로 전쟁 때 이루어진 양민학살에 대한 진상 규명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위 동아일보 기사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10년 전 일어난 통영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조명했다.

같은 시기에 쓰인 1960년 부산일보는 이렇게 통영의 상황을 적고 있다.

“통영지역에서도 110명의 보도연맹원이 7월 중순부터 통영경찰서 유치장과 통영극장, 봉래극장에 연행된 후, 같은 달 26일 광도면 안정리 무지기 고개에서 총살당했으며, 그해 8월에도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의심을 받은 민간인들이 통영경찰서 유치장과 항남동 헌병대 멸치창고에 갇혀 죽음에 이를 정도로 고문을 당한 후 9월 19일께 통영 명정동 절골 뒷산에서 총살당하거나 한산도 앞바다에 수장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헌병대 수석문관으로 양민 학살 가해에 가담했던 이양조는 자기 손을 거쳐간 사형 대상자의 명단이 810명 이상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멸치 창고 안에 매일 270~280명씩 들어차 있었다는 사실과 2~3일에 한 번씩 총살이 이루어진 사실도 증언했다.

사형은 대개 초저녁부터 밤 10시 사이에 집행됐다. 한 번에 47~48명씩 끌고나가 배에 태운 다음, 한산도 앞바다로 나가 뱃전에서 총살을 했다. 열 명 단위로 멸치부대 매는 새끼줄로 묶은 다음 양 끝에 돌멩이를 매달고 총을 쏘면, 사람들은 도미노처럼 넘어져 바다에 수장됐다.

일부는 대낮에 공개처형되기도 했다. 공개처형은 9월 19일, 20일, 21일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한 번에 15~20명씩 멸치포대를 머리에 씌우고 그 위에 빨간색 글씨로 ‘이적행위’ 등을 써서 시내를 끌고 다닌 다음 충렬사 뒤쪽 절골에서 총살한 것이다.

명정동 절골 희생지에 표지판이 서 있다.

헌병대 문관들은 절골에 미리 구덩이를 파 놓고, 희생자들이 도착하면 일렬로 구덩이 앞에 세우고 같은 수의 군인과 문관들이 총을 쐈다. 구덩이 안으로 굴어떨어진 다음에는 확인사살까지 집행했다.

처형 여부를 결정한 책임자는 오덕선 계엄주동관이었다.

무지기고개에서 죽였다는 명단이 110여 명, 항남동을 거쳐간 헌병대 사형 명단이 810여 명이다. 그 외 G-2, CIC도 자체적으로 처형을 했기 때문에 실제 희생자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남망산공원 인근 장좌도 금굴 등에서도 학살이 이루어졌다.


학살의 시작, 통영계엄사령부

1950년 7월, 통영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인민군에 대처하기 위해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7월 4일에는 문화동 두룡금고조합에 진해해군통제부 통영 헌병분견대가 설치됐다. 초대 분견대장으로 오덕선 중위가 파견되었으며, 대원은 40명 정도였다.

7월 8일에는 통영군 전체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박태진 대위가 주둔사령관으로 왔다. 이 외에도 CIC·HID‧G-2, 민간단체로서 해상방위대(대장 하채원), 비상시국 대책위원회(위원장 이두복), 경찰전투대 등 8개 전투단체 및 수사기관이 통영에 주둔했다.

계엄사령부와 헌병대는 지난호에 기록한 대로 보도연맹원들을 구금해 7월 26일과 27일 광도면 무지기고개에서 학살했다.

이후 통영은 8월 17일에 인민군에 점령됐다가 이틀 반만에 해병대의 상륙작전으로 탈환된다. 인민군이 점령한 다음 통영군민들은 방공호 파는 일과 밥을 해주는 일 등에 동원됐다. 원문 밖으로 쫓겨난 인민군이 한 달 동안 광도면과 도산면에 숨어 있으면서 원문고개에서 교전을 벌였기 때문에 그곳 주민들은 더 오랫동안 부역에 동원될 수밖에 없었다.

인민군이 물러간 뒤 헌병대는 부역자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밥을 해주었다고, 도망치는 데 배를 태워주었다고 수많은 사람이 잡혀왔다. 위협에 의한 부역도 용서되지 않았다.

헌병대의 앞잡이 노릇을 한 해상방위대와 G-2 보조원들은 ‘헌병보’라는 완장을 끼고 평소 관계가 좋지 않았던 사람들을 빨갱이로 지목했다.

첫 회에 소개한 독립운동가 김철호처럼 ‘반민특위’ 활동이 희생의 이유가 되는 일도 있었다.

일제에 부역했던 친일파들이 경찰로 복귀해 권한을 잡으면서, 자신의 친일행적을 문제삼는 이들을 오히려 빨갱이로 모는 일도 생긴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헌병보의 손에 끌려간 사람들은 당시 헌병대 유치장으로 쓰고 있던 항남동 멸치창고에 감금돼, 자기 입으로 좌익활동을 했다는 자백이 나올 때까지 고문을 당하고는 바다에 수장되거나 총살됐다.

1960년 5월 24일 부산일보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심지어 앞잡이들은 수사관에게 허위정보를 제공하고는 끌어다가 잔인한 고문을 하고 얼굴이 예쁜 처녀나 여자들은 잘 봐준다고 능욕했다는 것이다. 또한 복천관이란 요정을 경영하던 배정희(사망) 씨는 박대위에게 미녀를 공납하고 뇌물을 바치고는 박대위를 손아귀에 넣고 잡혀간 사람들의 구명을 한 ‘브로커’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붙들려간 가족들은 배씨에게 매달려 수 없는 돈을 바쳤다는 눈물겨운 사실도 말했다.”

전체 희생자가 900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1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신원을 확인한 통영 사람은 54명뿐이다.

이토록 집단적인 학살이 이루어졌는데도 어떻게 70년이 넘도록 정확한 피해 규모도 밝혀지지 않은 것일까? <계속>

학살의 기억 1. 명정동 옥정업(80)

“교복치마 입은 아아가 무신 사상을 알끼가?”

내가 어릴 적에 사람들 머리에 멸치 포대 씌워서 줄줄이 엮어가 명정동에서 총살하는 기를 봤거든. 그때 한 영감은-영감이라캐봐야 나이가 그렇게 많지 않았을 거야.-안 갈라고 하니까 자전거 뒤에 실어가 가데. 그런데 중도에 발버둥을 치고 못 데려가니까 그 자리서 총을 쏴서 죽여삐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더 겁을 먹어가 줄줄이 끌려가는데, 한 아아는 곤색 교복치마를 입었는 기라. 그 아가 무신 사상을 알끼가? 명정동 저 위게 타작하는 장소가 있었는데, 거기에 구덩이를 파고 거기서 죽였는 기라. 억울한 사람 많았을 기라.


학살의 기억 2. 문화동 김택청(83)

구덩이 가에 세워놓고 뒤에서 총을 쏴 떨어뜨렸다

열한 살 때 머리에 뭐를 씌운 사람들을 줄줄이 엮어 충렬사 앞으로 해서 명정동 절골로 끌고가는 것을 봤지. 눈만 뚫어놔서 누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몇 번째에 울 아버지다 하는 거를 알고 따라가는 아이도 있었겠지.

충렬사 앞에 오니까 따라오지 말라고 위협을 해. 무슨 배짱이 있었는가, 나는 끝까지 따라갔어. 산기슭에 구덩이를 파놓았는데 거기에 사람들을 죽 세우더라고. 그러고는 뒤에서 총을 쏴 구덩이 안으로 떨어뜨리는 거야.

총을 맞으니까 사람 몸이 퍼들퍼들 떨리데. 그 모습이 아직도 선하지.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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