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식 경상대학교 명예교수

정한식 경상대학교 명예교수

아버님은 3남 3녀 중에서 장남이었다. 막내 동생을 공부시키기 위하여 진주로 가서 동생과 자취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목수 일로서 동생의 학비를 충당하였고, 숙부는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고 한다. 숙부는 고향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또 한 분의 숙부도 공직의 일을 하는 분으로서 동네에서는 지식인으로 살았다고 한다. 6.25 전쟁이 일어났고, 그러한 와중에 이데올로기의 혼란 속에서 두 숙부님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동생을 찾기 위하여 진주 남강변의 시신을 헤집고 다닌 이야기, 요즘의 파출소에 해당되는 지서를 찾아다닌 이야기 그리고 자정을 넘긴 한밤에 경찰과 군인들의 불시 가정 방문과 수색을 당하기도 하는 등 한(恨)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연좌제의 고리에서 우리 가족들은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사촌 형제들은 공직 진출이 불가능하였고, 큰 형님은 그 피해자가 되었다. 자식들의 상급학교 진학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나, 농사일을 하길 원하였던 아버님의 깊은 심정을 이제야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아버님은 한 번도 세상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부족함으로 여기고 억척스럽게 농사일을 하신 세월 그리고 겸손하게 주변을 챙긴 기록들을 막내 자식인 나에게 남겨 주신 수첩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어머님은 양반 가문으로부터 시집을 왔다고 들었다. 시집 올 때 몸종을 데리고 왔다고 하니, 그 당시 외갓집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한다. 동네사람들은 어머님을 신사임당이라고 하였고, 나에게도 어머님의 모습은 그렇게 보였다. 기억력이 대단하시어 우리 동네 서른다섯 집의 제삿날과 생일날 등 기념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이웃집에서 시집 장가가는 일이 있으면 우리집 재봉틀로써 혼수 옷가지를 만들어 주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나의 학교 교복을 손수 만들어 주셨다. 그러나 나는 기성복을 사 주지 않는다고 투정을 많이도 하였다. 동네 친구들과 하루 내내 놀다가 해거름에 집에 들어간 날, 나의 책이 모두 부엌 아궁이에 들어가 있고 누님의 귀띔으로 급히 책을 챙겨서 책상 앞에 앉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머님은 아무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 공부하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자식 공부시키는 지혜를 가지고 계신 분이었다. 아버님에 대한 깊은 신뢰와 존경심을 자식들에게 보여줌으로서 우리에게 아버님은 하늘보다도 더 높은 분이었다, 혹시나 나의 나쁜 행동을 아버님이 아실까 걱정하는 어머님을 보면서 자세를 가다듬은 일들이 많았다. 그러나 아버님이 나에게 주신 가장 큰 야단은 ‘쯧 쯧 쯧’ 혀를 차는 것이 전부였다. 월요일 새벽 4시에 눈을 뜨면 이미 머리맡에는 아침상이 차려져 있었다. 중학생 아들의 자취 식량을 지게에 챙겨 두고 아침밥까지 원하는 시간에 정확하게 차려 주신 일들이 엊그제 같다.

어버이 날이 되었다. 이제는 먼 하늘나라에 계시는 부모님이 많이 그리워진다. ‘아버님, 어머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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