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식 경상대학교 명예교수

10여년은 어머니가 우리와 같이 지내면서 우리집 아들 셋을 보살펴 주셨다. 그 덕분에 아내는 중등학교 교사로 지낼 수 있었고, 세 아들도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어머니는 나의 든든한 빽이다.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늘 아들 편이다. 그러나 좀체 그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또한 자식들에게는 나를 엄한 아버지의 위상으로 어머님이 만들어 주셨다. 퇴근길에 초인종을 누르면 텔레비전을 즐기던 아이들은 후다닥 자기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모습을 연출하는 것도 어머니의 손자 교육의 한 방법임을 훗날 알게 되었다. 멀리 출퇴근하는 아내를 대신하여 동네 길가 좌판 사장에서 장보기는 어머니 몫이었다. 가격을 깎거나 더 달라고 하지 않는다. 늘 부르는 대로 그리고 담아 주는 대로 장보기를 한다. 그러다 보니, 시장 상인들은 ‘부자집 할머님’ 또는 ‘마음씨 좋은 할머님’으로 칭하여 주었다. 어머니의 말씀은 그 할머님들은 한뼘되는 땅에서 힘들게 키운 채소들인데, 어찌 그것을 깎거나 더 달라고 하겠는가라고 말씀하시곤 하였다. 시장상인들도 어머니의 그러한 마음을 알고는 자연스럽게 더 주거나 가격을 낮게 부르기도 하여서 훈훈한 동네 인심을 느끼면서 살았다.

대학 졸업하고 신입 직장인으로서의 애환도 많았다. 선배님들의 환영식에서는 늘 음주가 뒤따랐다. 식사하고 막걸리 파티를 하기도 하고 또는 가라오케에서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기도 하면서 선배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회사의 높은 분들과 형과 아우가 되기도 하였다. 통행금지 시간을 겨우 지키고, 부랴부랴 택시에 몸을 싣기도 하였다. 귀가하면 발걸음 소리를 조심하면서 어머니가 주무시는 큰방을 지나서 우리 부부의 부엌방으로 향하곤 하였다. 뒷날 아침이면 내가 좋아하는 무국이 상위에 오르곤 하였다. 아내는 빙긋이 웃으시면서 ‘어머님이 당신 어제 벼슬하였다고 하던데~~~’ 어머니는 이른 아침에 아내에게 어제 저녁에 내가 벼슬하였다고 하면서 숙취 국물을 준비하도록 하고 어머니도 부엌일을 도왔다.

한해가 저물어 간다. 송년회 자리에서는 요즘도 한 잔의 술 또는 노래방에서 한 해가 가는 것을 아쉬워하는 시간을 보내고 늦은 시간에 귀가하기도 한다. 아내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용히 대문을 열고 들어온다. 곤히 잠들어 있는 아내의 곁을 지키고 난 아침이면 아내는 무국을 준비하고는 “당신 어제 밤에 벼슬하였데요”라고 하면서 웃어 준다. 어머니가 지어주신 벼슬을 요즘도 하고 있는 나에게, 이제는 아내가 그 벼슬을 주기도 하는 송년의 하루가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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