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병관 현판과 통제사 비석에 새겨진 역사
세병관 현판과 통제사 비석에 새겨진 역사
  • 통영신문
  • 승인 2019.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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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사연구회 이충실 연구원

이충실 연구원은 2012년부터 세병관의 현판과 통제사 비석의 비문을 해독하기 시작해, ‘세병관 현판 해설’이라는 책을 펴내고 통영의 묻힌 역사를 발굴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편집자 주-

오늘 우리는 통영 역사의 거대한 뿌리를 찾아가는 또 하나의 당면한 사명을 수행하고자 한다. 과거는 내일을 비추는 거울이기에 통영의 미래를 세계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구국정신의 중심인 통제영(統制營)을 심층적으로 조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우리 통영은 통제영이 설치된 이후 그와 관련한 많은 역사자료가 남아 있다. 그중에서 삼도수군통제사들의 삶의 지혜와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 바로 세병관이다.

세병관 안에는 43개의 현판이 있다. 이 현판들은 우리 선조들이 사료의 기록을 얼마나 중요시 했는지를 알 수 있는 증거이다. 당시 수군들의 직책과 군사문화 등은 물론이고 정1품부터 종9품까지의 관리 2,289명의 직책, 성명, 거주지 등이 명확히 구분하여 새겨져 있다.

세병관은 제6대통제사 이경준이 1604년에 창건했다. 그러나 이전 제5대통제사 류형(柳珩)의 현판이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 이전부터 현판이 제작되었다고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1593년부터 1895년 폐영될 때까지 208대 194명의 통제사들이 약 303년 동안 부임했다. 그러나 그중 76여 명만이 임기 2년을 채우고, 그 외 통제사는 임기를 채우지 못했거나 초과한 통제사도 있었다. 통영 충렬사원지(忠烈祠院誌)에 의하면 묘당(廟堂:의정부)의 발령은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은 이들도 상당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병관 내 43개의 현판은 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전승하고 평가하는 자료다.

우리 통영의 딸이며 대하소설‘토지̕̕ ̕의 작가이신 박경리 선생께서는“세병관은 누가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사명감을 갖고 태어난 것이다. 세병관은 우리에게 마음의 의지이자 두려움 그 자체였다”라고 설파한 바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통영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자, 시민 모두에게 알려져야 할 유산이다.

영국의 총리를 지낸 윈스턴 처칠은“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말했다. 미래 세대인 우리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이를 더욱 잘 보존하여 후세에 물려주어야 한다는 책임을 느낀다.

세병관 바깥 통제영 내에는 86기의 비석도 있다. 그 중 61기는 잘 정돈되어 세워져 있고, 2014년 통제사길(무전동 통영초 뒤편 언덕길)에서 발견된 25기는 입구에 누워 있다.

그 중에서 맨 앞에 세워져 있는 이경철통제사의 비 1기를 소개하여, 비석 전체가 어떤 의미들을 담고 있는지를 짐작해 보고자 한다.

가선대부 삼도수군통제사 이경철 사적비

오호라 ! 공의 인품은 참으로 맑고 깨끗하여 속세의 사람 같지가 않은 분이었으니 가위 덕이 피어남을 감출 수가 없고 명성은 아무리 감추어도 더 높아만 갔다.

공이 통제사로 재임한 3년 동안을 돌아보면 백성들을 한마음으로 보살피고 위엄있게 행동하면서 성낼 줄을 몰랐고, 나라를 걱정하되 몸을 상할 정도는 아니었으며, 자애롭되 단호하게 일을 처리하고 한결같이 측은하게 여기고 모든 이들에게 애련한 마음을 가졌으니 이것이야말로 임금에 대하여 충성하는 것이고 선의를 베푸는 것이 아닌가?

공은 풍류도 즐길 줄 아는 어진 사람이었고, 전함 8척에 배치 된 장비 중 노(櫓)가 가장 소중한데 큰 것은 두 사람이 간신히 들어 어깨에 멜 정도였으므로 능노군이 노가 무거워서 그 역할을 할 수 없는 괴로운 폐단이 생겨나 점차 되돌리기 어렵게 된 지가 오래 되었다. 이에 공이 스스로 많은 봉급을 덜어내어 능노군들의 오래된 어려움을 해결하고 불필요한 일들은 없애주고 우리들을 사랑으로 대하고 가르쳐서 하나의 물건이라도 절약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쓸 수 있게 하였다.

이리하여 물자를 스스로 갖추어 연중 쌓아두고 쓰도록 하였다. 시에 붙어서 말하기를...

백성을 사랑하고 육성함이 누가 공과 같으랴

인자함은 빈민을 구제함으로 드러났고

그 혜택은 가난한 백성까지 미친다.

거리마다 그를 찬양하는 노래 소리가 그치지 않고

골목마다 그를 보내는 아쉬움에 눈물짓는다.

석자 비석에 새긴 이 업적을 만인이 눈물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영조 35년(1759) 기묘 4월 분성 김석조 짓고 쓰다

능노군들이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