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납치사건(1974년)<br>
김대중 납치사건(1974년)

심청전이 대성공을 거두자, 한국은 심청전을 서울에 초청하여 공연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심청전의 규모가 너무 커, 심청전 대신 류퉁의 꿈, 나비의 미망인을 1973년 3월 22일 국립극장 신축 축하공연으로 확정했다. 선생도 초청을 받아, 미국 콜로라도 에스펜에서 열리는 음악제에서 작품 연주와 강연을 마치고, 한국으로 들어올 준비를 했다.

국제적 성공과 아프게 떠났던 고국으로의 금의환향에 황금빛으로 설레는 시간.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때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짜이퉁”에 김대중 납치사건이 보도되었고, 각지에 있는 동료들이 선생의 서울행을 막아, 귀국 계획은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김대중 납치사건을 언론을 통해 시시각각 접하면서, 동베를린사건 당시 국제적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의 구명운동으로 목숨을 구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 선생은 1974년 8월 15일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고, 국제사회가 김대중 구출 운동에 나서야 한다고 강력히 호소했다.

“나는 조국의 민주주의의 번영을 위하여, 예술가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으나 이번 사건에 관련해서 서독이 얼마나 강력한 민주주의에 의거한 정치를 시행하고 있는가를 알았다. 비록 외국인이라 할지라도 한 나라의 정부는 그의 인권을 끝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며 김대중 사건도 민주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며 김대중 씨 자신의 의사가 실현될 것을 희망한다.”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으로 장기집권을 계획했던 엄혹한 시절, 이 사건을 계기로 선생은 적극적으로 조국의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선생의 열정적 사회참여는 작곡에도 투영되었는데, 동베를린사건 당시 감옥 생활의 고통과 절망이 담긴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1975), 나치 수용소에서 처형을 기다리면서 쓴 알브레히트 하우스호퍼의 시 ‘모아비트 소네트’로 작곡한 “사선에서”(1975), 2차 세계대전 때 스웨덴으로 망명한 유태인 여류시인 넬리 작스의 시로 작곡한 “밤이여 나뉘어라”(1980) 등이 이 시기 선생의 사회참여를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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