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바르츠 실링 교수와(1959)

약 1년간의 고생스러운 파리 생활을 마치고 1957년 7월 선생은 서베를린으로 이주했다. 보리스 블라허라는 저명한 작곡가의 지도를 받고 싶었고, 생활비와 등록금 등도 고려한 처사였다.

서베를린 음악대학에 적을 둔 선생은 스스로 나이를 20세 줄이고 20대 청년이 되어 젊은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생활하며, 보리스 블라허, 슈바르츠 실링, 요제프 루퍼 등 현대음악의 전선에서 강한 이력을 소유하고 있는 이들의 지식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갔다.

베를린 유학 시절 선생의 가장 큰 체험 중 하나는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였다. 1958년 9월, 26개국에서 온 200명의 젊은 음악가들이 모인 다름슈타트 음악제에서 당시 전위파를 대변하는 존 케이지 연주를 듣고 선생은 큰 충격을 받았다. 고국에 있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는 선생의 혼란스러운 마음과 당찬 각오가 알몸으로 드러나 있다.

“나는 산더미를 준다고 해도 이런 음악을 쓰기는 싫으며, 여기 모인 이 괴짜들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소. 아니 그들보다 더 엉뚱한 짓으로 세인을 놀라게 할 수도 있으나 나는 어디까지나 ‘음악’ 속에 순수하게 머물고 싶으며 신기한 것으로 앞장서는 선수가 되기는 싫소.”

“여태까지 내가 쓴 작품은 하나도 싸우기 위한 것이 아니었소. 나는 최전선에 선 전위파와 싸울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니까. 나는 그들과 싸울 작품을 쓸 여력이 없었고 또 그들의 정체를 몰랐소. 그러나 나는 여기 와서 비로소 그들의 정체를 파악했소. 그리고 내 작품의 위치를 스스로 매기기 시작했소. 그래서 나는 그들과 싸우는 작품을 쓰겠소.”

2년간의 베를린 음대 시절은, 선생이 현대음악뿐만 아니라 서양음악의 전통과 역사적 단계를 모두 습득하는 시간이었고, 다름슈타트 음악제를 통하여 시대를 대표하는 전위적인 급진파들(슈토크하우젠, 루이지 노노, 불레즈, 마데르나, 존 케이지 등)과 교류하며 새로운 음악과 실험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간 시기였다.

이들 전위파 속에서 자리를 견고히 할 것인가? 아니면, 동아시아의 전통 음악과 결합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길을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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