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문두 성모의원 원장

“이중섭 작품만 104점...‘흰소’ 50년 만에 공개”

삼성 이건희 회장이 국립현대미술관에 1488점의 미술작품을 기증했다는 기사를 접하는 순간, 통영 성모의원 유문두 원장은 눈이 번쩍 띄고 가슴이 벌렁벌렁했다. 이중섭이 통영에서 그린 황소, 흰소 같은 작품이 목록 맨 위에 올라와 있었다.

“이 황소나 흰소는 이중섭 화가가 통영에서 그려서 전시회를 했던 작품입니다. <흰소>는 이중섭이 통영을 떠날 때 당시 통영시장이던 김기섭 씨에게 감사의 선물로 주었다고 하는데, 그 아들인 김동욱 전국회의원이 선거자금을 마련하느라 팔았다고 합니다. 김동욱 씨는 나중에 이중섭의 작품을 팔아버린 사실을 후회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고 해요.”

이중섭은 1952년부터 1954년까지 통영을 오가거나 머무르면서 대표작 <흰소>와 <황소>, <달과 까마귀>, <부부>, <가족>, <도원>등을 그렸다. 전쟁 후 너무나 가난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이중섭이었지만, 그래도 통영에서는 경남도립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에서 데생을 가르치고 문화예술인들과 어울리면서 유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형편이 됐다.

이중섭 <흰소>

통영에서 전시회를 열면서 그는 “아빠 그림이 잘 팔리면 우리 아들들 보러 갈 수 있어요.” 하는 다정한 편지를 일본에 보내기도 했었다. 그런 이중섭의 작품이 이번 이건희 회장의 기증으로 세상에 나오자, 그야말로 전국이 발칵 뒤집혔다. 지자체마다 이중섭과 조그만 인연이라도 있으면 작품을 달라고 난리다.

“지금 안산에서는 <김홍도>를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중섭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도 안산에 김홍도 미술관 있다는 이유로 요청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통영은 이중섭이 2년여 머무르며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도시인데도 황소 그림 하나 달라는 말을 못하고 있어요.”

유문두 원장은 통영을 사랑하는 개인의 마음만으로도 이런 사실이 아깝고 안타깝다. 사실 그는 이미 3년 전에 통영에 황소 미술관을 짓자고 건의를 했었다.

“이중섭 미술관이라는 이름은 먼저 서귀포가 가져갔기 때문에 쓸 수 없으니, 통영은 ‘황소 미술관’을 짓자고 주장했지요. 스페인의 빌바오나 스위스의 바젤 등은 미술관 하나 잘 지어서 세계적인 미술 도시가 됐어요. 만약 그때 그 건의가 받아들여져 미술관을 지었다면, 아니 지을 계획이라도 내놓았다면 지금 <황소>는 통영시가 달라 소리 안 해도 오지 않겠습니까?”

이중섭이 11개월 머물다 간 서귀포는 이중섭미술관, 이중섭 거리를 만들며 이중섭이 평안도 사람인 것을 잊을 만큼 스토리를 만들어 나가는데, 길게 2년까지 이중섭의 흔적이 남아 있는 통영이 이렇게 속수무책인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림을 가져와도 둘 데가 없어 못 가져온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미술관을 지어서라도 가져와야지요.”

유문두 원장은 내년 3월에 이중섭 특별전을 한다니, 실제로 가져오기까지의 시간이 걸리는 만큼 시민운동을 벌일 작정까지 하고 있다. 유 원장은 성모병원 3층에 ‘이중섭과 통영’이라는 이중섭 기억공간을 만들고 갤러리를 운영할 만큼 이중섭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다.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관심을 가졌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요. 통영 사람이니까, 이중섭이 전시를 했던 곳, 어울렸던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면서 그당시 통영 예술인들이 참 멋진 교우를 했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요.”

유문두 원장이 펴낸 12권짜리 대하소설 ‘귀향’

2014년 유문두 원장이 펴낸 12권짜리 대하소설 ‘귀향’에도 이중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유원장의 어머니가 모델이 된 ‘귀향’은 1943년부터 2008년까지의 통영사를 배경으로 50가구 되는 작은 마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일제시대와 6·25, 인민군 포로수용소, 새마을운동, 월남 파병, 경제개발 등을 겪으며 변모하는 통영을 무대로 다양한 삶과 운명이 그려진다.

짙은 통영 사투리를 그대로 구사해 낸 것과 통영의 역사를 고스란히 드러낸 것만으로도 역사적인 가치를 갖는 이 대하소설은 당시 병원 의사가 썼다는 사실이 보태져 세상의 주목을 끌었다.

“죽을 날을 받아놨기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아프지 않았다면 생각도 못했을 일이지요.”

한산도에서 태어난 유문두 원장은 한산중학교까지 마치고 통영에 있는 누나네 집에서 통영고등학교를 다녔다. 카톨릭의대에 진학해 인턴생활을 할 때 집안 내력인 급성간염을 앓았다. 군의관을 하던 때 간경화로 진행되자, 스물다섯 살 미처 피지도 못한 나이에 그는 고향으로 요양하러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고향에서 유문두 원장은 서호시장 인근에 ‘성모의원’을 열고 지금까지 동네의사로 살고 있다. 2007년, 유문두 원장은 편도암 선고를 받았다. 목 부위의 임파절까지 침투한 악성 3기였다.

수술을 받고 3주 만에 다시 병원 문을 열었지만, 환자는 반으로 줄었다. 원장실에 혼자 멍하니 앉아 있다 보면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왔다고 한다.

그래서 유문두 원장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들에게 내가 살아온 날들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했지요. 순서도 없이 생각나는 대로 살아왔던 얘기를 적어 내려갔어요. 쓰다 보니 어려서 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넣게 되고 통영의 역사도 조사해 넣게 되면서 소설을 쓰게 됐습니다. 수십 번 고쳐 쓰면서 3년 만에 완성했는데, 지금 읽어보니 너무 아쉬운 점이 많아요.”

지금 유원장은 귀향을 다시 쓰고 있다. 모자라는 데는 더 자세히 쓰고 잘못된 부분은 수정하는 동안 분량은 배로 늘어 현재 19권이 됐다.

“19권으로 끝내려고요. 올해 중에 출판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의사이며 소설가인 유문두 원장은 병원 내에 나전칠기 전시관과 3층에 이중섭 갤러리를 만든 열정으로 통영을 상징하는 미술관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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