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영의 둑제(纛祭)가 112년 만에 재현됐다.

통제영 둑제가 112년 만에 재현됐다.

지난 24일 통제영 중영에서는 조선시대 수군의 본부였던 삼도수군통제영에서 봄가을에 하던 둑제를 재현했다.

군대의 출정에 앞서 군신을 상징하는 ‘둑(纛)’에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며 올린 ‘둑제’는 문신(文臣)들이 공자를 모시는 석전제만큼이나 중요한 무신(武臣)의 제례다.

적장의 머리를 창에 꿴 형상의 둑기(纛旗)는 군법의 지엄함을 나타내거나 군신(軍神)을 상징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선후기 약 300년간 조선수군의 총본영이었던 삼도수군통제영에서 봄의 ‘경칩’과 가을의 ‘상강’일에 둑제(纛祭)를 지내왔다. 제례뿐 아니라 헌관이 제를 올릴 때마다 간척무, 궁시무, 창검무 등의 무무(武舞)를 추는 무인들의 춤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의 장이 펼쳐졌다.

초헌관은 강석주 통영시장이 맡았다.

서울에서는 병조판서가 주관해 둑제를 지냈으며, 지방 군영에서는 고을의 수령이 헌관이 되어 지냈다. 조선시대 해군본부였던 통영에서는 중앙보다는 한 격이 낮게, 그러나 다른 군영보다 더 엄하게 둑제를 지냈다.

통제영의 둑제는 임진왜란 중인 1593년 8월 이순신 장군이 한산진에서 지냈던 것을 시작으로, 난중일기에서 3번이나 확인되는 중요한 의식이다.

그러나 1895년 통제영이 폐영되고, 1907년 군대 해산령이 내려지면서 둑제는 중단됐다.

김일룡 통영문화원장은 “통제영의 둑제는 통제영이 폐영된 다음에도 1년에 한 번씩 지내오다가 1907년에 중단되었다.”고 고증했다. 그에 따르면 이번 둑제 재현은 112년 만이다.

김일룡 원장은 “이번 재현은 ‘통제영 둑소홀기’와 ‘통제영 둑제의(纛祭儀)’를 바탕으로 제례의 순서, 참가자, 시일, 장소 등과 함께 음식, 무용, 복식 등 조선 후기 통제영에서 행해졌던 둑제를 최대한 원형 그대로 살려 복원했다.”고 말했다.

통제영 둑제는 홍둑과 흑둑 각 1위를 안치한다.

복식과 깃발, 제기 같은 기물과 음악, 간척무, 궁시무, 창검무 같은 기술, 제례의 순서 같은 예법도 모두 통제영둑제홀기에 따랐다. 김 원장은 “원주, 서울, 부산 등 각 지역의 전문가들을 찾아가 둑기와 복식을 제작하느라 시간과 공이 많이 들었다.”면서 이번 고증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말했다.

병조에서 주관하는 둑제에는 홍둑 2위와 흑둑 2위를 놓았지만, 지방 군영인 통제영에서는 각 1위를 안치했다. 또한 깃발도 임금을 상징하는 황룡대기를 비롯한 청룡기, 황룡기, 적룡기, 백룡기 대신 각 방위의 무신을 상징하는 수호기인 오방신기(五方神旗)를 세웠다.

통제사를 포함한 삼헌관이 제례를 지냈다는 기록에 따라, 초헌관은 강석주 통영시장, 아헌관은 통영에 주둔하고 있는 육군 제8358부대 제1대대장인 김진성 중령, 종헌관은 통영문화원 신영철 부원장이 맡았다.

악공들

헌관이 제를 올릴 때마다 태조 이성계의 무공을 찬양하는 ‘납씨가’와 태조의 위화도회군을 찬양하는 ‘정동방곡’을 연주했다. 또한 승전무이수자인 김정련 교수가 무무(武舞)를 고증해, 24반무예를 전승하고 배우는 ‘통제영무예단(김종선 단장)’의 학생들이 춤을 추었다. 무사들이 방패와 도끼를 들고 추는 ‘간척무’, 활과 화살을 들고 추는 ‘궁시무’, 창과 칼을 들고 춤을 추는 ‘창검무’를 했다는 고증에 따른 것이다.

통영문화원 김일룡 원장은 “깃발 하나, 갑옷 하나에도 최선을 다했다.”라며, “지방의 군영에서 했던 둑제를 재현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번에 기본적인 준비가 되었고 기술적인 면도 축적이 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둑제를 할 수 있는 바탕은 마련된 셈이다. 통영문화원 관계자는 “재정만 된다면 1년에 한 번씩 할 수 있다.”고 말했다.

112년 만에 돌아온 둑제는 또 하나의 통제영 문화가 복원됐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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