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김성우

▲ 언론계 굴지의 명문장가 김성우 선생.

나는 돌아가리라. 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리라. 출항의 항로를 따라 귀항하리라. 젊은 시절 수천 개의 돛대를 세우고배를 띄운 그 항구에 늙어 구명보트에 구조되어 남몰래 닿더라도 나는 귀향하리라. …빈 배에 내 생애의 그림자를 달빛처럼 싣고 돌아가리라.

-‘돌아가는 배’ 중에서-

욕지에서 태어나 서울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일보 기자가 되어 언론계 굴지의 명문장가로 알려진 김성우 선생(86)이 섬의 날과 한산대첩축제의 공연으로 인해 이달 초 통영을 찾았다.

지난 8월 8일 통영시민문화회관에서 열린 제1회 ‘섬의 날’ 기념식에서 선생의 작품 ‘돌아가는 배’가 공연됐다. 모노드라마 형식이면서 음악과 춤, 영상 등의 모든 매체가 동원된 이 공연은 손진책 전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연출하고 전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인 김성녀 배우가 출연한 특급 무대였다.

“두 분 모두 통영 수국도에서의 내 결혼식에도 참석했던 각별한 친구분들입니다. 김성녀 배우는 전날 다른 공연을 마치고 심야버스로 당일 새벽에 내려 무대에 섰을 정도로 바쁜 일정에도 출연을 기꺼이 맡아 주었습니다.”

▲ 남해찬가 공연.

한산대첩축제 기간인 13일에는 김성우 선생이 구성하고 지도한 ‘남해찬가’ 공연이 있었다. 김용호 시인의 서사시 ‘남해찬가’는 김성우 선생과 서울 재능시낭송협회 시낭송가 팀의 손에서 장엄한 공연으로 다시 태어났다.

재능시낭송협회는 김성우 선생이 신문사에 근무하면서 추진했던 시 보급 운동 ‘시인만세’의 여파로 탄생돼,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시낭송 전문 단체가 됐다.

“시는 모든 예술의 기초이고 시낭송 운동은 전 국민의 문화인화 운동의 시발점입니다. 특히 시는 나의 태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릴 적, 김성우 선생은 섬 선창가에 있던 집에서 밤마다 물결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고 한다. “이 해조음이 내게 시의 리듬을 가르쳤다.”고 회상하는 선생은 기자생활을 할 때부터 지금까지 50년이 넘도록 시낭송운동을 하고 있다. 시 보급에 앞장선 그 공로가 얼마나 지대했는지, 한국시인협회와 한국현대시인협회는 그에게 ‘명예시인’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한국연극협회도 연극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명예배우’라는 이름을 주었다.

그는 “내 신문 기자 생활의 가장 큰 훈장은 ‘명예시인’과 ‘명예배우’라는 칭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일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는 전혀 없는 전대미문의 칭호이고 신문 기자가 아니었으면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영예입니다.”라고 말한다.

그가 언론인으로 산 기간은 44년이다. 당시로서는 최장기 근속 언론인이다. 한국일보에서 파리특파원, 편집국장, 주필, 상임고문 등을 역임한 그는 “신문 기자를 선택했다기보다는 선택되었다고 해야 옳다.”고 말할 만큼 천상 언론인이다.

“신문 기자는 정의감을 실현하는 직업입니다. 확성기를 입에 물고 있어서 조그마한 소리를 내도 방방곡곡에 다 들립니다. 무소불통의 패스를 가지고 아무 곳이나 갈 수 있고 아무나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자유로운 직업입니다. 이런 매력이 나를 평생 신문 기자가 되게 했습니다.”

언론인으로 살면서 그는 ‘칼러기행·세계문학전집’ ‘파리에서 만난 사람’ ‘문화의 시대’ ‘돌아가는 배’ ‘명문장의 조건’ ‘신문의 길’ ‘수평선 너머에서’ 등을 썼다.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서울시문화상(언론 부문), 통영시문화상을 비롯해 삼성언론상, 보관문화훈장, 프랑스 국가공로훈장 등의 상훈도 받았다.

김성우 선생이 통영에 내려올 때마다 ‘집사’를 자청하는 한 전직공무원은 “욕지의 진짜 자산은 고등어, 풍광, 고구마가 아니라 김성우 선생이다.”라고 자신한다. 김성우 선생 역시 섬사람이라면 흉을 보던 시절에도 욕지도 출신임을 자랑하고 다닌 섬의 아들이다.

“내 이름은 욕지도와 동의어나 다름없습니다. 욕지도는 나를 탄생시킨 곳일 뿐 아니라 나를 전적으로 만든 곳입니다.”라며, 늘 가슴에 고향을 담고 산다.

그의 고향 욕지도 새천년기념공원 옆에는 고향 사람들이 세워준 문장비가 서 있다. 이 문장비에는 ‘월간 조선’이 ‘한국 100대 명문’으로 선정한 ‘돌아가는 배’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아마도 순수한 문장비는 전 세계적으로도 유일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도 도민들의 모금으로 세워진 것이라 더욱 뜻 깊고 나로서는 고향 사람들에게 큰 빚입니다. 이 문장비는 내 책 ‘돌아가는 배’를 기념한 것입니다마는 고향을 떠난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만인의 귀향 운동을 선창한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난 2005년 욕지면 동항리 자부마을에 집을 짓고는 ‘돌아가는 배’라는 옥호를 붙였다. 지금은 서울과 욕지를 오가며 생활하고 있지만, 그는 늘 “태어난 곳으로 영영 돌아오는 것”을 꿈꾼다.

고향은 집이다.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집이다. 쉬지 않기 위해 집을 나서고 쉬기 위해 찾아온다. 나는 꼭 만 18세의 성년이 되던 해 고향의 섬을 떠나왔다. 내 인생의 아침이었다. 이제 저녁이 된다.

모든 입항의 신호는 뱃고동소리다. 내 출항 때도 뱃고동은 울었다. 인생이란 때때로 뱃고동처럼 목이 메이는 것. 나는 그런 목메인 선적(船笛)을 데리고 귀향할 것이다.

-‘돌아가는 배’ 중에서-

▲ 욕지도에 세워진 문장비.
▲ 한산대첩 축제에서는 팬들이 몰려들어, 깜짝 사인회가 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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