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고분군 ‘탁월한 보편적 가치’ 지닌 곳…동일생활권에 조상대대로 상생하며 살아

<통영고성 행정통합만이 살길이다>

▢ 프롤로그―시·군행정 통합의 필요성

■ 공통점—역사, 문화, 사회 등 통합의 시작

▢통합을 바라는 사람들 1,2,3(통영, 고성)

▢다른 도시는 어떻게 하고 있나(통합의 장‧단점)

▢통합 협의체의 필요성(추진위 구성)

▢마무리-통합의 숙제, 간담회

 

한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고 조상대대로 살아온 지역주민들의 정서를 훼손할 수 있음을 감안하면 임의적인 행정구역 개편은 신중하게 추진해야 한다.

옛부터 동일생활권을 가지고 있었던 통영과 고성은 문민정부와 참여정부 시절 거제까지 합하여 동일 행정구역으로 논의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모두 물거품이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였다.

1991년부터 시작된 풀뿌리 민주주의의 꽃인 본격적인 지방자치를 실시,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져왔다. 이러한 때 시민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는 행정구역개편은 풀뿌리 민주주의 지방자치를 오히려 후퇴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지역정서와 뿌리를 생각하지 않은 인구중심적인 행정편의적 개편안으로는 난황을 겪게 되는 이유이다.

이제는 지역민 스스로 나서야 할 때다. 특색있는 발전 특화전략을 수립해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잘못된 전철을 기회로 삼아 함께 살아가는 길을 찾는다면 못할 일도 없다는 게 많은 이들의 목소리이다.

역사적 배경과 지역주민의 뿌리, 그리고 조상대대로 살아온 삶의 방식 등을 고려해 추진안을 수립해야 한다. 과거 동일 생활권이었거나 현재 그렇게 살아가는 지역이라면 그 특성을 존중하며 행정구역 통합추진을 논의한다면 지역민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영 본부가 있었던 통영과 고성은 오래전부터 생활권이 같은 지역이다. 통영과 고성은 ‘통영’이란 이름이 생긴 조선시대 훨씬 이전부터 역사적인 배경과 생활권이 하나로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고성은 ‘단단한 성곽의 도시’

통영과 고성은 구석기, 신석기시대부터 서로 엮여있는 관계이기에 먼저 역사적인 유래부터 살펴보자.

고성이란 지명은 2천년 이전의 원삼국시대 변한지역 12나라 중의 하나인 변진 고자미동국의 건국으로부터 시작된다. 서기 42년 한의 광무제 건무 18년 김수로왕의 6형제중 막내인 말로(末露)가 소가야국을 세웠다. 소가야는 별명인 고자국(古資國)으로 또한 포상팔국연맹체의 중심세력국이었다. 지금의 고성은 신라 경덕왕 때 붙여진 이름이다. 통일신라 경덕왕 18년(757) 고성군으로의 개명은 옛명칭을 한자화하여 표기한 것으로 고성은 ‘단단한 성곽의 도시’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는 고려중기 고성의 이칭이 ‘철성’으로 불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고성은 소가야의 옛땅이다. 고성을 중심으로 한 소가야 권역은 통영·사천을 비롯한 남해안 일대와 진주·산청 등 내륙의 남강수계가 해당된다. 세부적인 차이는 있지만 삼각형투창고배, 수평구연호, 수평구연발형기대 등으로 대표되는 ‘소가야토기’를 사용하며 석곽을 여러 개 조성하는 다곽식의 매장풍습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권역으로 볼 수 있다.

5세기 후반에서 6세기경에 한반도 남부지역은 물론 큐슈의 고분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고성식토기’이다. 고성인들은 이들 토기에 자신들의 특산품을 싣고 남해안을 누비며 교역을 통해 성장하였다.

‘소가야’의 중심지로 잘 알려진 고성의 사회는 다른 가야지역과 같이 귀족중심의 사회였다. 이들은 대형의 무덤을 건립하고 막대한 부장과 순장을 통해 자신들의 권위와 부를 과시했다.

이러한 소가야 유적인 가야고분군이 지난해 9월 17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가야고분군’은 한반도에 존재했던 고대 문명 ‘가야’를 대표하는 7개 고분군으로 이루어진 연속유산이다.

세계유산위원회는 ‘가야고분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면서 “주변국과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독특한 체계를 유지하며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가 인정된다”고 평가했다.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 때 전국에 실시한 9주 5소경의 행정구역개편 및 정비와 함께 명칭을 고성군으로 개칭하고, 강주(康州)에 예속시켜, 문화량현ㆍ사수현ㆍ영선현의 3개의 속현을 관할하게 하였다.

이 행정체계는 고려시대 초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아 경덕왕 때의 행정개편은 별다른 변화 없이 통일신라 전반 및 고려시대 초까지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현종 9년(1018) 전국을 4도호부 8목 56주군 28진으로 나누게 되면서 고려의 지방제도가 완전히 확립하게 되었으며, 통일신라의 지방명칭과 행정체계에 대한 완전한 정비가 이루어지고 기존의 체계와 명칭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하지만 여전히 통영은 독립적인 행정단위로 자리 잡지 못하고, 고성군 또는 거제현의 일부에 속하고 있었다.

■통영은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출발해

통영은 한반도의 남단인 남해바다와 접해 있다. 따뜻한 해양성기후와 풍부한 수산자원 그리고 해로를 이용한 교통망 등 인간이 생활하기에 적합한 환경을 갖추고 있다. 아열대성 기후와 풍부한 수산자원을 획득하기 편리한 지리적 여건 등을 볼 때 통영지역은 일찍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지역이었다.

연대도·욕지도·상노대도 같은 섬에는 신석기시대 조개무지가 많이 남아 있다. ‘신석기 문화의 보고’라 일컬어질 만큼, 신석기시대 전 시기에 걸쳐 많은 유물들이 나왔다. 이후 청동기시대에는 남평리 지석묘 유적에서 토기류와 함께 석검, 석촉, 다량의 옥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이 유물을 통해 청동기시대의 통영에도 우월한 지위를 가진 지배층이 등장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4세기 이후의 낙동강 이서지역에서 가야가 자리하고 있었다. 일본서기에는 가야지역에는 13개의 소국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고성, 통영, 사천 일대는 고차국(古嵯國)으로 알려져 있다.

통영은 소가야 지역에 속했던 곳으로 보인다. 삼국지에 나오는 염사치 설화를 보면 기원 후 1세기 전반에 연안항로가 발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다를 끼고 있는 지역에서 중국의 한(漢) 계통이나 왜(倭) 계통의 유물이 출토되는 현상을 보아도 이 일대 해안지역이 고대 해상 교통로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가 가야를 멸망시킨 후 현재의 고성지역에는 고자군(古自郡)을 두었고, 경덕왕 16년(757)에 고성군으로 이름을 바꿨다. 지금의 통영은 강주에 속한 고성군의 일부가 되었다.

통영이라는 지명은 고려시대까지도 등장하지 않는다. 행정상으로는 거제현에 속해 있는 ‘두룡포’라는 작은 포구였다. 이 시기의 유적으로는 춘원역지와 당포성지가 대표적이다.

조선시대에는 고성군에 속한 하나의 관방으로 임진왜란 이전에는 가배량수(加背梁戍)라 하였고, 수군도독만호영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인 선조 26년(1593) 삼도수군통제사가 있는 통제영을 한산도에 두면서 중요시되었다. 선조 35년(1602) 제5대 통제사인 유형(柳珩)이 통제영을 거제현 조아포에서 고성현 춘원포로 옮기면서 거제의 행영이 되었다. 그 다음해인 선조 36년(1603)에 제6대 통제사인 이경준에 이르러 다시 통제영을 두룡포에 설치했다.

1604년에 현재의 통영시역에 해당하는 거제현 두룡포에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수군의 최상위기관인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되었다. 통영(統營)이란 이름도 ‘삼도수군통제영’에서 따온 것이다. 이때부터 이 지역을 ‘통영’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후 14년간 통제영이 두룡포에 있다가 광해군 9년(1617)에 다시 두룡포가 고성현에 이속되었을 때 이름이 바뀌어 춘원면이라 불렀다.

고종 32년(1895)에 통제영을 폐지하고 그 다음해에 고성에 고성지방대를 설치, 군사 400명을 주둔시켰다. 광무 4년(1900)에 고성군 춘원면은 고성군에서 떨어져 나와 진남군에 편입되었고, 융희 3년(1909)에 진남군이 다시 용남군으로 바뀌어 춘원면은 용남면 두룡포리가 되었다. 행정구역이 개편된 1914년 다시 용남군과 거제군을 합쳐 통영군으로 개칭할 때 두룡포리는 통영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31년 통영 시내 지역인 통영면이 통영읍으로 승격되고 용남면으로 분리하고, 1938년 거제도의 이운면이 장승포읍으로 승격되었다. 1955년 9월 1일 통영읍이 충무시로 승격됨에 따라 통영군에서 분리되었다.

이후 1995년 시·군통폐합에 따라 충무시와 통영군은 통영시로 통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성병원 기자

통영의 탄생 역사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시대

연도

내용

삼한시대

-

변진 12국 중 고자미동국에 속함

가야시대

 

6가야 중 소가야에 속함

삼국시대 및 신라시대

 

포상팔국 중 고자국(혹은 고사포)에 속함. 뒤에 자군(고자군, 현 고성)을 설치함.

통일신라

시대

742~764(경덕왕)

고자군을 고성군으로 개칭함

757(경덕왕 16)

고성군이 9주 중 강주(현 진주)에 속함

고려시대

995(성종14)

산남도의 고주자사(고성현이 승격됨)에 속함

1018(현종9)

거제현에 속함

1275~1308(충렬왕 때)

남해현에 병합되었다가 다시 복귀함

조선시대

1604(선조37)

삼도수군통제영을 거제현 두룡포(현 통영시)로 옮겨와 설치함

1869(고종6)

두룡포가 고성현에 이속되어 춘현면이라 개칭함

1872(고종9)

춘원면의 호적관계 분류로 이듬해에 고성부치를 통영성내로 옮김

1895(고종 32)

고성지방대를 설치함(1907년 폐대)

1900(광무 4)

진남군을 설치함(통제영터 전역과 고성군의 도선면, 광이면, 광삼면, 거제군의 가좌도, 한산도)

1909(융희 3)

용남군으로 개칭함

일제강점기

1914

용남·거제 양군을 통합하여 통영군이라 개칭하고, 춘원면을 통영면이라 개칭함

1917

통영면이 지정면으로 됨

1931

통영면이 통영읍으로 승격됨

1936

통영읍의 구역을 확장함(통영면 일원과 산양면의 미수리, 봉평리, 도남리, 당동리, 인평리, 평림리)

광복 이후

1953

거제군이 분리되어 감. 통영군-1(통영읍) 6(용남, 광도, 도산, 산양, 한산, 원량)

1955629

통영군 원량면이 욕지면과 사량면으로 분리됨

195591

통영읍이 충무시로 승격되면서 통영군과 분리됨

충무시 : 16(도천, 서호, 명정, 항남, 중앙, 문화, 태평, 동호, 정량, 북신, 평림, 인평, , 미수, 봉평, 도남)

통영군: 7(용남, 광도, 도산, 산양, 한산, 욕지, 사량)

1967529

광도면 안정출장소를 설치

1973

통영군의 용남면 무전리가 충무시에 편입(행정동-북신동)

197371

남해군의 갈도가 통영군에 편입

1985

충무시 북신동에서 무전동이 분리되어 행정동으로 되고, 인평1동과 인평2동이 인평동으로 통합됨

199511

충무시 통영군을 통합, 도농복합형태의 통영시 설치(7201출장소)

199811

행정동중 서호동 및 구 평림2, 명정동을 명정동으로, 항남·문화·태평동을 중앙동으로, 동호동과 정량동을 정량동으로, 인평동과 평림동중 구 평림1동을 인평동으로, 당동과 도천동을 도천동으로 통합(16111출장소)

1999816

행정기구 통합에 따라 안정출장소 폐지, 광도면에 통합(1611)

20101231

행정동 중 도천·인평동을 도천동으로, 미수1·2동을 미수동으로, 봉평·도남동을 봉평동으로 통합(168)

 
저작권자 © 통영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