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명품 만드는 통영 장인

 

용남면 조성연 누비장
용남면 조성연 누비장

세계 5대 브랜드인 에르메스의 명품이불이 통영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에르메스의 이불을 만들고 있는 장인은 용남면에 있는 조성연 누비장(62). 재불(在佛) 설치미술가인 이슬기 작가의 디자인을 구현해 내, 통영누비를 세계 명품의 자리에 올려놓고 있는 것이다. 캐시미어로 ‘변방 늙은이의 말’ 등 세가자제 작품을 12점씩 한정 제작해 2017 밀라노 가구박람회에 전시한 것이 에르메스 상표를 붙이게 된 시작이었다. 36개 한정품으로 제작된 이 제품은 각각 1500만원씩에 팔렸다.

“원래 누비는 천을 누비는 사람, 제품을 만드는 사람이 구분되어 있어요. 하지만 이슬기 작가와 하는 작품은 원단을 누비는 것부터 전 공정을 제 손으로 하고 있어요. 그것도 컨디션이 나쁠 때나 마음이 쫓길 때는 재봉틀에 앉지 않고, 여유롭고 평안한 마음으로 작품에 임할 수 있다 싶을 때만 작업을 합니다. 에르메스에서는 절대 날짜를 독촉하는 법이 없어요. ‘제대로 된 작품’만을 요구하기 때문에, 저도 명품의 품격에 걸맞는 작품을 만드는 데만 마음을 쏟고 있지요.”

이슬기 작가는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이 뽑은 ‘올해의 작가상’ 수상자다. 1972년에 서울에서 태어나 선화예고 졸업 후 프랑스로 건너갔으며, 30년째 프랑스에서 체류하면서 세계의 장인들과 협업하는 다양한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조성연 장인이 바느질로 구현해 내는 이슬기 작가의 누비이불 연작은 호주 빅토리아 국립미술관에 영구 소장되기도 하고, 갤러리 현대와 미메시스아트뮤지엄 등에서 개인전으로 전시되기도 하고, 에르메스, 이케아 등의 브랜드와의 협업으로 소비자를 만나기도 한다. 삼성 리움미술관은 해마다 12명 작가의 작품을 담은 한정판 달력을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선물해 상류사회 문화를 만들기도 하는데, 2020년에는 조성연 장인과 협업한 누비이불 12점으로 달력을 제작해, 이슬기 작가 한 사람만을 주목하기도 했다.

이 이불 연작의 시작은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파리 국립그래픽조형미술재단의 지원으로 ‘이불 프로젝트 U’ 연작을 기획한 이슬기 작가는 통영의 조성연 장인을 만나기 위해 프랑스에서 통영까지 날아왔다. 작품을 제대로 구현해 줄 장인을 찾아 수년간 물색한 끝에 찾아온 것이다.

1mm까지 점검하는 세세한 샘플 제작 과정을 거쳐 협업이 시작되었다. 운명적인 고수와의 만남이었다. 가로 155cm, 세로 195cm인 이 이불들에는 디자인마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왕이면 다홍치마’, ‘우물 안 개구리’, ‘불난 집에 부채질한다’ 같은 한국 속담 제목이 붙었다.

이 이불 연작들은 2014년 광주비엔날레에 초청되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더니, 명품회사들과의 판매로도 이어졌다. 지금도 조성연 장인의 작업실 벽에는 아직 제품으로 변하지 않은 디자인이 걸려 있다.

조성연 장인은 원래 숙녀복을 만들던 기술자였다. 열아홉 살 때부터 일찌감치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몇 년 안 가 이곳저곳에서 탐내던 1등재봉사가 되었다. 기술자들은 좋은 대우를 받고 옮기거나 의상실 개업을 하는 방식으로 길을 열어가고 있었지만,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사이즈별로 기성복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골목마다 성행하던 의상실이 하나둘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것이다.

스물일곱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서울의 기성복 회사에 들어갔다. 전동미싱으로 한 가지 패턴을 수백 벌씩 만들어야 하는 그곳에서, 그의 기술은 더 정교해지고 숙련되었다. 아무나 다룰 수 없는 소재로 말끔한 제품을 만들어내는 일은 기술자로서의 보람과 성취감을 선물하기도 했다. 하지만 거대한 생산구조 속에서 반복되는 작업을 하는 것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얼마 뒤에 패턴실로 자리를 옮겨, 디자인한 샘플을 만드는 일을 하니 조금 숨통이 트이기는 했지만 그는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명절 때 고향에 내려오면 아주 기초적인 바느질로 누비를 만들고 있는 거예요. 전국에서 누비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데, 생산지는 오직 통영뿐이었으니까요.”

조성연 장인에 따르면, 강구안에 있는 대호누비에서 처음 통영누비를 만들었다고 한다. 통영 주석장인이 만든 특수한 노루발로 일정한 간격의 누빔천을 만들 수 있었고, 이것이 혼수품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하자 갑자기 전국적인 붐이 일게 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통영에서 가장 잘할 수 있다면 세계에서 가장 잘할 수 있다는 것이네?’

온갖 까다로운 천을 다 다뤄본 조성연 장인은 최고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마음과 함께 고향에서 일할 수 있다는 점, 보람과 가치를 살릴 수 있다는 점 등을 생각하며 고향에 내려왔다. 1993년, 30대 초반을 지나고 있었다.

“뒤늦게 시작했으니, 작품으로 승부를 볼 수밖에 없었죠. 직접 누빔천을 만들기도 하고, 흔히 마감재로 쓰는 다우다천을 쓰지 않고 제천으로 마감을 하기도 하고, 지갑 안쪽을 숙녀복에 쓰이는 심지를 사용해 실용성을 높이기도 했지요.”

혼수문화도 빠르게 변해 누비이불도 사양길에 들어선 지 오래지만, 조성연 장인은 끝까지 누비이불을 고집하며 만들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 당시 20여 년 지켜온 작가의 고집이 이슬기 작가와의 만남에 다리를 놓아 준 셈이 되었다. 그 뒤로 10년이 지났다. 통영누비뿐 아니라 전통공예 모두가 내리막길을 걷고 있지만, 예술과 명품화로 그의 누비는 더 빛을 발한다.

“전통공예는 현대화, 고급화, 명품화해야만 살 수 있습니다.”

이미 명품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장인의 말 속에, 통영누비의 가능성이 들어 있다.

빛좋은 개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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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이면 다홍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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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공예진흥원 '수작수작'전에서 전시한 '낭중지추' 작품
서울 공예진흥원 '수작수작'전에서 전시한 '낭중지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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