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특징 없는 조립식 건물에서 장원 씨는 문화예술인들이 드나드는 작은 도서관을 내다보고 있다.

“저는 미친놈입니다.”

서피랑지기라는 별명을 달고 문화해설사로 일하는 이장원 씨(42)는 서슴지 않고 자신을 미친놈이라고 소개한다. 미치지 않고서야 제 돈을 까먹어가면서 고향도 아닌 통영에서 문화 콘텐츠를 개발한다, 서피랑을 살려낸다 하며 뛰어다니겠는가?

▲ 서피랑 99계단의 포토존이 된 서피랑 공작소.

창원에서 통영으로 옮겨온 지 3년 반, 그러나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것밖에 안 됐나?” 하며 놀란다. 통영에서 그의 동선이 크기 때문이다.

처음에 장원 씨는 이순신 콘텐츠를 개발하려고 통영에 왔다. 그러나 막상 와보고는 서피랑에 꽂혔다.

“서피랑 골목은 그대로 문화입니다. 박경리 선생이 나고 자랐고, 공덕귀 여사가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김약국의 딸들이 이곳을 배경으로 펼쳐지며, 충렬사와 명정골로 이어지는 은행나무길에 통영의 영광과 애환의 역사가 배어 있습니다.”

장원 씨는 서피랑의 골목길이 좋아, 이곳에 ‘쌀롱드피랑’이라는 공간을 마련했다. 벼랑을 뜻하는 통영 사투리 ‘피랑’에 문화예술 시장을 만들겠다는 뜻이다. 서피랑에서 시작해 통영 곳곳에 숨어 있는 문화의 흔적을 살려내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겠다는 거창한 뜻도 있다.

올해 장원 씨는 서피랑 끝에 있는 열 평 남짓한 쌈지교육장을 위탁받았다. 회색 칠이 되어 있는 네모난 조립식 건물을 무상으로 대여해 줄 뿐, 전기세도 프로그램운영비도 없는 위탁이다. 간이화장실 하나에 스무 평 남짓한 마당을 사용할 수 있지만, 마루도 꺼져 있고 낡은 뒷 담장에 마른 담쟁이덩굴이 붙어 있다. 솔직한 표현으로 건설현장 임시사무소 같다.

이곳을 맡고 있는 통영 RCE는 쌈지교육장으로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현실적으로 예산 문제와 부딪쳐 고민하다 위탁사업자를 모집했다.

위탁사업자 공고를 접한 장원 씨의 머릿속에서는 이 칙칙한 회색건물이 동화 속 마법의 공간으로 태어나기 시작했다.

▲ 본부 역할을 했던 쌀롱드피랑은 이제 사회적기업인 늘푸른사람들과 함께 운영할 계획이란다.

‘빨간 색을 칠할 거야. 마을도서관을 만들면 어떨까? 박경리 선생의 생가가 옆에 있고, 김약국의 딸들에서 한실댁과 용빈이 넘어다니던 길목에 있으니 책이라도 한 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되면 좋겠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긴 뭐지?’ 하고 돌아볼 수 있는 공간이 돼야 해.’

장원 씨의 상상 속에서 쌈지교육장은 주민들이 동아리 모임을 하기 위해 드나들고 예술가들이 창작을 하며, 관광객이 사진을 찍고 기웃거리는 곳이 되어 있었다.

페인트부터 책장 마련, 도서구입까지 자비로 감당해야 하는 점이 부담스러우면서도 장원 씨는 어느새 계획서를 제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경쟁자 한 사람 없이 선정됐다.

“공간이 정비되면 ‘내 인생의 책’ 한 권씩을 기증해 달라고 할 겁니다. 그리고 공고를 해서 저처럼 미친놈들을 모집할 겁니다.”

장원 씨가 말하는 미친놈은 통영에 와서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쓰거나 음악을 만들 예술가들이다. 이미 인프라가 형성돼 있어, 공간만 있으면 머무르면서 창작활동을 하고 싶어하는 이들을 장원 씨는 많이 알고 있다. 과거의 문화예술인만 되새기며 통영의 영광을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생동하는 예술인들이 통영에서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장원 씨의 꿈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 공간이 시선을 끄는 특별한 곳이 되어야 한다.

공간에 대한 장원 씨의 상상력이 미더운 건, 그가 만든 ‘서피랑공작소’, ‘쌀롱드피랑’ 같은 공간이 이미 관광객의 눈길을 끄는 포토존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장원 씨는 오늘, 다 쓰러져가는 쌈지교육장의 낡은 담장 속에서 소박한 미술품이 다정하게 걸려 있는 야외 갤러리를 본다.

▲ 마른 담쟁이덩굴이 뒤덮은 낡은 담장을 보며 장원 씨는 야외 갤러리를 꿈꾼다.

 

▲ “과거의 예술인들만큼 열린 마음으로 오늘의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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