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리 토박이 조문제

“96년 12월 115만 3900원으로 끝났다. 이게 내 33년치 월급봉투다.”

조문제(86) 할아버지는 세월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 누렇게 변한 월급봉투 모음을 내놓는다. 처음 받은 월급이 3천901원, 여러 세금이 제해지는 중에 청약저축 50원도 있다.

“한번은 봉투째 도둑맞아삐고 해서 딱 두 장이 없다.”

어느새 은퇴한 지도 25년, 세월이 주마등같이 지나갔다.

“생각해보면 좋은 세상 봤다. 왜정시대 태어나가 일본 공부도 하고, 전쟁 지난 뒤에 우리나라가 일어나는 것도 안 봤나. 지금은 이래 좋은 세상에 살고 있지.”

모진 세월을 지나왔는데도 조문제 할아버지는 ‘좋은 세상 살아서 행복하다’고 말한다. 초긍정 마인드의 멋쟁이 할아버지다.

통영 안정은 고성과 가까워 옛날부터 학교를 고성으로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조문제 할아버지도 고성농고를 졸업했다. 입학할 때는 6년제인 고성농중에 입학했지만, 다니는 동안 중고등학교 편제가 바뀌었다.

통영에서 벼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은 안정 들이 유일하다.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면 당연히 농사꾼이 되던 시절, 청년 조문제는 안정 넓은 들에서 벼농사를 짓고 살았다. 스물네 살 때 중매로 스물한 살 각시를 맞아 결혼도 했다.

“나이는 찼는데 영장이 안 나오는 기라. 알아보니 내 병적카드가 없다캐. 아마 담당자가 병적카드를 잃어버린 모양이라.”

스물일곱 살, 두 아이의 아빠가 된 다음에 그는 군대에 갔다.

“이 얘기는 아무도 모르는데, 사실 내가 가서 ‘내 영장 끊어내라’고 말해가 영장이 나온 기다. 당시에 사촌이 병사계에 있었거든. 그때는 그런 일이 가능했다.”

가만히 있으면 평생 영장이 안 나올 수도 있었다. 이미 나이도 군대를 가기에는 너무 늦어 있었다. 1년 건설단 노역을 하고 ‘군필’ 자격을 얻는 길도 있었지만, 기왕 의무를 다하는 거, 차라리 군대를 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우리 집사람은 지금도 영장이 늦게 나와서 군대 간 줄 안다. 부모님도 그런 줄 아셨지. 속초 위에 진부령 넘어서 있는 강성에서 군생활을 했다.”

최전방에 있는 연대사령부에서 군생활을 했지만 다행히 보직이 인사과여서 고생스럽지는 않았단다. 오히려 늦게라도 의무를 다했다는 떳떳함이 있었다. 자원해 군대에 간 일은 국가공무원으로 33년 재직하는 길의 첫단추가 됐다.

“제대 후에 농사를 6개월 정도 더 지었지. 그런데 신문에 ‘농촌지도사’를 모집한다는 광고가 났는기야. 지원서를 쓰고 시험을 봐서 합격을 했지.”

국가공무원이 되기 위해 군필은 선행 조건이었다.

“첫 발령지가 창녕이었어. 그게 참 행운이었지. 창녕만 해도 여기 농사짓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거야.”

농촌지도사를 ‘선생님’이라고 부를 때였지만, 사실 창녕에서의 2년은 새로운 선진농법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창녕의 경험 덕에 그는 통영 농촌지도소로 돌아와 30여 년 근무하며 의미 있는 역할을할 수 있었다.

빛바랜 월급봉투

빛바랜 월급봉투가 증명하는 것은 성실한 가장의 삶이다. 아들 둘, 딸 둘, 다복한 자녀들은 착하고 똑똑하게 자라 주었다.

“큰딸이 통여고 졸업한 뒤에 동생들을 맡겼지. 자기는 대학도 안 가고 마산에서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고마. 그 덕에 동생들은 마고, 제일고 나와서, 둘이 서울대를 가고 하나가 경희대를 갔지.”

그를 아는 사람들은 한 집에서 둘이나 서울대를 보냈다며 부러워했다. 자랑스러운 마음이 클수록 큰딸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컸다.

“나중에 자기도 통신대를 가서 공부를 하더구만. 시골에서 서울로 대학을 보내려다 보니 하나는 희생을 해야 했던 기라.”

아이들 넷이 타지에서 생활을 하다 보니, 아내는 보따리장사를 하며 자녀들 교육비를 보탰다. 참 부지런히 살아온 세월이다.

그런 아내가 지금은 요양원에 있다. 원래 협착증으로 수술을 거듭하며 9년 동안 거동이 불편했는데, 석 달 전에 화장실 문을 열다가 넘어져 대퇴부를 다쳤다.

“그동안은 거동이 불편해도 걸을 수는 있어서 내가 살살 데리고 내려가고 올라가고 하며 지냈다. 그런데 대퇴부를 다쳐가 수술하고 나서는 꼼짝을 몬 하는기라.”

아예 걸음을 못 걸으니 감당이 안 됐다. 할 수 없이 요양원에 보냈지만, 때때로 아내가 옆에 없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지금도 옆에 있는 것 같고 생각이 난다. 걷기만 하면 바로 데리고 올기라.”

노을 지는 안정 들에 서서 아내를 기다리는 조문제 할아버지.

어느새 이렇게 세월이 흘렀는가 싶지만, 성실함으로 살아온 세월 속에 켜켜이 감사를 새길 수 있어서 오늘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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