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밤을 보내고 여기 왔는지
거친 비가 오는 소식을 듣고도
넘어오던 언덕을
당신이 서 있던 언덕을

보고 싶던 그날만큼
정명(正名)되지 못한 아픔
당신이 만든 심장에서 시작하였지

이만 용서할까
수없이 물어보던 자리에
누가 대신 앉았다가 돌아갔는지

얼마나 아팠는지 흐느끼던 소리에도
검고 흰 싹이 돋는다
잎맥에서 벌어지는 전투적인 생존

그럴수록 새벽마다 걸러둔 긴 선몽에도
꽃은 멍을 지우지 못한 채
비 그친 배경 뒤에서 기다리는
오래된 품

그만 간 듯하여도 얼굴을 덮지 말고
한 낮 덮쳐오는 태양처럼
미끌미끌한 그 길
빠르게 훑고 지날 조문길을 열어주며

당신도 긴 그림자 앞세우고
피다 지는 모든 것에
눈물 흘려 주어야지
반쯤은 감은 눈을 마저 덮어주고

오늘까지는 이겼으니 푹 쉬라는
느긋한 편지를 읽는
깊은 가을을 눈 앞에 두고
거룩히 순장되는 상상을 하는
당신은 그 꽃


*용담꽃 : 설사 꽃이 많이 달려 처지고 바람에도 약해 쉽게 쓰러지지만, 그 속에서 꽃이 많이 피기 때문에 자르면 안된다. 당신이 힘들 때도 나는 사랑합니다의 꽃말을 가진 용담꽃은 여름에 피는 야생화다. 여름의 감성을 끌어올리려다 보랏빛의 매력에 자칫 우울해진 시를 썼다.

정소란(시인)

정소란 시인 (1970년 통영출생)
-2003년 월간 ‘조선문학’ 등단
-2019년 시집 (달을 품다) 출간
현재 시인의꽃집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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