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스라친 모습으로 나를 보던 날은
풋물이 터질듯 한 하늘을 받친
훤칠한 정자에 앉았다가 오던 길

야윈 대궁에 눈길도 뜨거워
꽃은 열병에 타고 있어
단봉(丹鳳)을 보낸 가슴을 닮았던 그대

누구도 빤히 들여다보고
그대의 시간을 알려고 하지 않으니
지금부터는 평조(平調)의 노래를 준비하오

땅으로 다시 스며드는 모습이 부끄러울 것도 없으나
그래도 서운한 사람 몇 몇은
황홀한 천일을 다시 보고 싶으니
얼마동안은 그대로 있어주겠지만

삭은 뿌리들이 마음대로 움직이고
저린 잎맥들은 풀 먹은 빗소리를 기다리는
늙은 노새의 발과 같아
나는 애석한 그대의 시간에 시를 몇 줄 얹을 테니
가을볕에 고단한 천개(千個)의 절개를 기록하오

그것도 모자란다면
무수한 진언을 다진 나의 영토를
수척한 여인의 발 같은 그대 밑둥에
단단히 밀어 넣어 줄 것이오


* 천일홍(天日紅): 보라, 빨강, 분홍, 흰색 등 작은 꽃으로 많이 핀다. 색이 오랫동안 변하지 않아 천일홍이라 하며, 화단조성이나 절화용, 드라이플라워로 애용된다. 올해는 특히 천일홍이 예쁘게 보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만끽하였으며, 서피랑 언덕을 지나오면서 본 천일홍의 모습에 가벼운 충격을 받고 시를 적어 보았다.

정소란(시인)

정소란 시인 (1970년 통영출생)
-2003년 월간 ‘조선문학’ 등단
-2019년 시집 (달을 품다) 출간
현재 시인의꽃집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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