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식 경상대학교 명예교수

정한식 경상대학교 명예교수

열차가 스위스 다보스로 접근하면서 철길 옆의 도랑에는 파란색을 띤 세찬 물이 흐르고 있었다. 여행객을 반기는 청명한 스위스의 공기를 마음껏 마시면서 다보스로 접근하였다. 조그마한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나무로 지어진 호텔은 역사성 때문인지 이곳의 분위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고향의 오래된 통나무집에 들어온 기분이다. 나이 지긋한 할머님의 안내로 들어선 방에는 낡은 방명록이 놓여 있었고, 50년 전부터 작성된 방명록에는 이 방에 투숙한 분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추억의 글도 있고 재미난 그림도 있었다. 그리고 색깔도 다양하였다. 나도 한글로 방명록에 기록을 남겼다. 혹시 50년 후에 나의 후세대가 이곳을 찾을 때 나의 흔적을 발견하는 기대를 담았다. 동네에서 멀지 않은 케이블카 탑승이 첫 여정이었다. 거의 수직으로 오르는 케이블카를 타고 산등선으로 올랐을 때 시원한 봄바람이 먼저 코끝에 왔다. 바람 그리고 형형색색의 꽃들이 산등선 바닥에 다닥다닥 붙어서 꽃의 천지를 만들고 있었다. 나무 한그루 보이지 않는 그곳에 꽃들만의 잔치가 열렸다. 긴 겨울에 쌓였던 눈과 얼음의 냉기로 부터 벗어난 그곳은 꽃의 세상으로 변한 것이다. 빨간색 알프스 산악 열차를 타고 오르는 알프스의 풍경은 그림으로 보아온 모습 그대로이다. 잘 정돈되고 깎여진 산록 그리고 간간이 나타나는 목동의 집들이 평화로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기차는 천천히 그 옆을 지나면서 서서히 고도를 높여 갔다. 만년설에 접근하였다. 밖에는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천지가 얼음 세상인 바로 옆에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봄은 땅 밑에 와 있는 것이다. 봄기운에 얼음의 아래 부분만 녹고 가을이 되면 다시 얼어붙는 것이 이곳의 만년설이다. 얼음 아래 부분의 녹은 물이 다보스 시내로 흘러 세찬 냇물을 만들어 주고 있다. 2,253M의 오스피지오 베르니나(Ospizio Bernina) 역에 도착하였다. 다음 열차를 기다리며 눈밭을 밟았다. 살을 에는 추위이지만 고도가 주는 희열감이 크다. 눈앞에 펼쳐지는 눈 세상에 우리 기차만이 이방인의 모습이다. 따듯한 커피 한잔을 손에 들고 삼삼오오 그 광경을 즐겼다. 고산지대의 촌락에 도착하였고 마을 중앙의 성당은 긴 역사를 안은 채 말없이 여행객을 맞이하였다. 호수 가에 누웠다, 눈에 묻혀 있는 산이 눈앞에 들어온다. 그리고 호수 속에도 그 산의 잔상이 또렷하다. 하늘의 하얀 구름이 내 위에서 내려 보고 있다. 얼굴에 스치는 시원한 눈바람 그리고 등 뒤의 봄기운을 같이 느끼면서 자연이 주는 은혜에 감사하다. 알프스는 길고도 혹독한 추위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 추위를 즐기면서 행복해 하는 사람들을 초대하는가 보다. 그곳에도 봄은 오고 그 틈에 꽃들의 잔치도 벌어진다. 만년설은 멀리서 바라볼 때 더욱 아름답다. 그가 보내준 눈 녹은 물로 만들어진 호수에 비춰진 바로 그 설산(雪山)의 모습을 즐길 수 있다. 멀리서 또는 가까이서 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그들의 모습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고개를 들면 저 멀리에서 예기치 못하였던 행복이 우리에게 나타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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