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도면 나무소리 오카리나 고현일 장인

구불구불한 해안선을 따라 통영의 아름다운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광도면 좌진마을, 산기슭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나무소리 오카리나’ 공방이 있다. 맑고 고운 소리로 심금을 울리는 오카리나는 도자기로 된 이탈리아 전통악기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나무로 된 오카리나를 만든다.

공방 주인은 나무 오카리나 제작법 특허를 가지고 20년째 악기를 만들고 있는 고현일(58) 씨다. 도천동에서 태어나 통중 2학년까지 통영에서 살았던 그는 40년간의 객지생활을 접고 3년 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려서는 늘 백운서재에서 놀았습니다. 안주인을 ‘서재어머니’라고 불렀지요.”

백운 고시완 선생의 후손인 고현일 씨는 백운서재 연못가에서 놀면서 자랐다. 학문과 예의를 중요시하는 뼈대 있는 집안이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정작 고현일 씨의 아버지는 세 살 때 돌아가셔서 기억에 없다. 누나 셋에 여동생 하나, ‘여자들은 안 배워도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수두룩하던 시절이었는데도, 어머니는 도천동 개펄에서 조개를 양식해 끝까지 5남매를 공부시켰다. “굶더라도 애들 공부는 시켜야 한다”는 아버지의 유언도 있었지만, 어머니 자신이 진명학교를 다닌 신여성이었기에 더욱 그랬으리라.

그런 교육열로 인해 고현일 씨는 어렸을 때 고향을 떠났다.

“늘 고향이 마음속에 있었지요. 언젠가 꼭 돌아가리라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윤슬 가득한 고향의 바다는 눈을 감아도 늘 잔상처럼, 여운처럼 찰박거렸다. 3년 전 어느 날, 고현일 씨는 낚시를 하러 통영에 내려왔다가 우연히 이 집을 발견했다. 눈앞에 통영 바다가 보이고, 집 뒤로 산이 있으며, 공방을 차릴 공간적인 여유도 있고, 마을과는 조금 떨어진, 꿈에 그리던 바로 그 집이었다. 교사인 아내의 정년이 한참 남아 잠깐 갈등했지만, 가족들도 집을 보고는 즐겁게 찬성했다.

고현일 씨가 오카리나를 만들기 시작한 건 2000년경이다. 당시 그는 시흥 시화공단에서 항공기 부품을 만드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취미로 시작한 오카리나의 매력에 빠져 직접 만들어 보기까지 했는데, 점점 주문이 늘어나자 아예 회사를 자형에게 넘겨버리고 오카리나 제작을 하게 됐다. 그 무렵은 오카리나 동호회가 많아지면서 붐이 일어났는데, 일일이 수제로 만들어야 하는 악기 제조는 그 수요를 따라잡지 못해 6개월씩 제작이 밀려 있었다. 그는 오카리나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러다 2002년에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났죠.”

정말 심혈을 기울여 만든 오카리나를 대여섯 살 된 작은아들이 깔고 앉아 부서져 버린 것이다. 그는 이성을 잃고 아들에게 화를 냈다.

“아내가 보니, 제 얼굴이 사람의 얼굴이 아니더랍니다. 그날로 아내가 집안의 오카리나를 모두 찾아내 깨버렸습니다.”

그깟 게 뭐라고 자식보다 귀할까. 삶의 가치가 전도된 것을 깨달은 고현일 씨는 그길로 사업자등록도 폐지하고 더 이상 오카리나를 만들지 않기로 결심했다.

6개월쯤 지났을까. 오카리나 없는 메마른 시간을 지내던 그는, 문득 ‘깨진 게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오카리나는 특성상 초벌구이만 해야 하기 때문에 잘 깨질 수밖에 없다.

“깨지지 않는 소재를 찾다가, 미국에 찰리 하인드라는 사람이 랭글리형 나무오카리나를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당장 그 사람에게 메일을 보내, 랭글리형 말고 이탈리아식 오카리나를 만들어줄 수 있느냐고 물었지요. 그런데 기술적으로 어렵다는 답장이 왔습니다.”

30년 동안 나무오카리나를 만들어왔다는 하인드 씨는 높은 ‘미’ 이상의 음을 낼 수 없어 이탈리아식 오카리나를 만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고현일 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찰리 하인드 씨와 나무오카리나 제작법을 주고받으며 어떻게 하면 높은 소리를 낼 수 있을까 날마다 연구한 끝에, 드디어 높은 ‘파’까지 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하인드 씨도 깜짝 놀랄 발명이었다.

이탈리아의 부드리오에서 개최된 국제페스티벌에서 나무소리 오카리나를 시연했다.

고현일 씨는 나무오카리나 제작법의 특허를 받아 ‘나무소리 오카리나’를 설립했다. 동호인들을 통해서 장인의 정보가 공유되는 그 세계에서, 나무오카리나는 특별한 관심을 받으며 성장했다.
2007년에는 오카리나의 본고장인 이탈리아 부드리오에서 열린 제4회 국제오카리나페스티벌에서 나무소리 오카리나가 올해의 스페셜 악기로 선정되어 특별전시와 함께 메인 콘서트에 사용됐다. 그러자 외국 연주자들의 주문이 이어졌다.

2008년 이후 오카리나의 대량생산이 시작되면서 장인들이 설 땅은 좁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좋은 소리를 찾는 애호가들은 장인들이 손으로 만든 가치 있는 악기를 찾았다.
생각보다 빨리 부천의 오카리나전시장을 접고 통영으로 내려오면서, 그는 고향에 가면 ‘옻칠’과 조우할 것을 기대했다. 그의 기억에 통영은 한 집 건너 한 집씩 옻칠을 하던 공방의 고장이었다.

그러나 막상 내려와 보니, 어린 시절 그 많던 공방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고, 기억에 있는 당시의 옻칠은 전통기법을 버린 가짜 캐슈 옻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전통 옻칠기법을 고수하고 있는 옻칠미술관 주위를 맴돌며 옻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계속 타진했다. 그리고 올해 드디어 통영시가 지원하는 ‘인재양성 아카데미’에 참석하게 됐다.

“처음 김성수 관장님과 마주앉아 차를 마시는데 어찌나 가슴이 두근거리던지, 꿈인가 생신가 했습니다. 그동안 저는 식물성 기름 외에 아무 마감도료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바로 이 옻칠을 만나기 위한 운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아카데미 개강을 앞두고 그는 서울에 올라가 부랴부랴 노안수술까지 했다. 관장님 앞에서 노안 안경을 쓸 수 없다는 마음,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고 배우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20년 동안 악기를 만들면서 허투루 만든 적은 없었지만, 관장님께서 70년 장인의 길을 걸으면서 한 과정도 소홀하게 하지 않는 모습을 보니까 ‘아, 나는 장인도 아니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통영, 나무, 음악, 옻칠… 만나야 할 모든 운명이 고향에 있었다. 고현일 씨는 음악의 도시 통영에서 통영의 옻칠로 이 모든 것을 완성하기로 했다.

나무소리 오카리나를 연주한 오스트리아 오카리나 앙상블팀
옻칠과 자개로 명품이 된 오카리나
독도를 육지에 연결한 한반도 오카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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