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어지러운 하늘
그가 풀어놓은 말을
들어보자 생각하고 오른 벼랑에
매홍지에 고이 품었다가 내려놓은
수줍은 화관만 남았다

푸른 쑥이 아직 봄인 듯 자라는 산등성
잔별이 꿈을 꾸는 집수터에서
옛사람은 물대신 별을 긷고
산성(山城)은 뒤집힌 시간을 예우하고
이름 새긴 와편 하나 성벽에 끼워두었다

성긴 돌담 날바람에 혹여 들리는 음성이 없어
산을 내려가는 길을 잃고
환석(丸石)하나가 그만 굴러간다
무심한 울음이 굴러간다

아직도 답을 모르니 피다지느라
꽃잎이 흔들리는 소리에
달빛에 길을 내고
송연묵향 품고 멀리서 오는 사람
이 길섶에서 하던 대로
또 기다리는 나는 구절초

채홍의 빛은 사라지고
연사(練絲)로 빚은 꽃잎이 처연한
바람 불고 구름 나는 하늘에 들리는
흰 깃발 흔드는 소리는
옛사람 지나던 문이 있던 쯤에 꽂아두면
도무지 들어도 알 수 없던
꽃부리 본능에 맡겨두던 그의 대답이
비로소 명료하다


구절초: 순수한 사랑의 절개라는 꽃말을 가진 구절초는 이름대로 9월(음력)에 흔히 볼 수 있는 야생화다. 봄에는 마가렛, 가을에는 구절초라는 차이를 알면 서로 헷갈리지 않을 수 있다. 옛 성에 핀 향이 진하면서도 외로워 보이는 구절초를 보고 이 시를 써 보았다.

정소란(시인)

정소란 시인 (1970년 통영출생)
-2003년 월간 ‘조선문학’ 등단
-2019년 시집 (달을 품다) 출간
현재 시인의꽃집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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