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식 경상대학교 명예교수

정한식 경상대학교 명예교수

진주에서 머리카락을 잘랐다. 머리카락이 툭툭 앞에 떨어지는 것으로 울컥하는 기분이었으나 꾹꾹 참았다. 당당히 입대를 하고 싶은데 그리 쉽지는 않았다. 진주역에서 입영열차에 올랐고 호송병의 친절한 안내를 받았다. 열차는 아쉬운 기적을 울리면서 출발하였다. 창밖의 그녀에게 이별의 손을 흔들었다. 5분 정도가 지났을 때, 호송병의 모습이 돌변하였다. 사회의 물을 빼야 하는데, 흐트러진 모습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순간 분위기는 살벌하여졌다. ‘가스’라고 하면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게 몸을 숨기라는 것이었다. “가스!”라는 명령과 함께 우리는 좁은 의자 밑으로 몸을 숨기려고 하였지만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동작이 늦은 사람은 그 자리에서 엎드려뻗쳐를 하는 등 일사 분란한 동작들이 진행되는 열차 안은 군대가 어떤 곳인가를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논산역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이미 사회의 물이 모두 빠져 군인이 되었다. 23연대에서 훈련병의 시간을 보내고 춘천 보충대 그리고 사단 교육대를 거쳐 강원도 양구 방산에서 최전방 군대생활을 하게 되었다. 자대 배치 동기들은 친구 이상의 전우이다. 같이 훈련 받고 기압 받는 애환을 함께 하였다.

이등병일 때 그분은 일병 말 호봉이었으니 직속 고참이다. 가장 두려워하는 고참은 계급이 한 칸 위의 분이다. 그러하니 이분은 나에게 가장 무서운 고참인 셈이다. 부대장 차량의 운전병으로 폼이 나는 멋있는 분이었으나, 내무 생활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는 것이 군대 생활이다. 일요일이면 외출증을 받아서 사진 찍기도 하고, 냇물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즉석 매운탕을 끓이기도 하였다. 한 잔의 술로서 군인으로서의 추억을 쌓았다. 그분은 제대하고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는 동안, 나의 휴가 때면 용돈도 주고 귀대 선물도 챙겨 주었다. 사우디아라비아로 파견되었을 때에도 편지로 소식을 나누었다. 힘든 청춘의 시간들도 군대의 추억담으로 넘기곤 하였다. 신혼 초 단칸방 시절에도 나는 서울에 가면 그분 집을 찾았고, 나의 아이들이 서울로 유학을 갔을 때, 옥탑방과 반 지하 자취방을 얻어 준 것도 그분이었다. 그분이 정하면 나는 무조건 오케이였다. 그분의 부인과 나의 아내도 절친이 되었다. 나의 아들 자취방 앞에 갓 담근 김치를 가져다 놓고 간 분은 그분의 부인이었다. 이제 세월이 흘러 나도 그분도 할아버지가 되었다.

가만히 세어보니 그분을 처음 만난 것이 44년 전이다. 그분을 만나기 위하여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 아내들은 모르는 군대에 대한 이야기로 만남은 장식되었다. 44년 전으로 거슬러 엊그제 같은 군 생활의 무용담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숯불에 고기가 타는 것도 모른 채 우리들의 지난 이야기는 식당 문이 닫힐 때 까지 계속되었다. 거나하게 취하여 비틀거림을 서로 의지하며 그분의 집인 부천으로 갔다. 주택지하에 마련된 음악실에서 그분의 색소폰 연주에 맞추어 어설픈 트롯을 목청껏 불렀다. 새벽까지 손잡고 노래하고 허그하며 추억을 더듬었다. 나에게 늘 은혜를 주신 그분을 나는 군대에서 만났고, 이제는 나의 은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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