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령이 됐던 통영, 57시간 만에 상륙작전으로 탈환

사열중인 해병대(1950년 9월), 전갑생 제공

1950년 8월 16일, 북한군 제7사단 소속 병력 약 350명이 원문고개를 침공했다. 원문고개를 지키던 경찰 병력 약 100명이 카빈 소총으로 저항했으나, 박격포와 중화기로 무장한 적을 당할 수 없어 한산도와 비진도로 철수했다. 적은 원문고개를 점령하고 통영읍 시가지로 들이닥쳤다. 6.25가 발발한 지 겨우 50여 일 만에 국토의 남단 끝 통영이 북한군 손에 들어간 것이다.

“거제 서해안을 지켜 통영의 적이 거제도로 침입하지 못하게 하라.”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은 해병대 김성은 부대장에게 거제 방비의 책임을 맡겼다. 이미 통영이 적의 손에 넘어갔기 때문에, 거제를 방비하려 한 것이다. 거제가 뚫리면 바로 진해로 연결, 낙동강 방어선이 위협받을 수 있었다.

밤 10시에 작전명령을 받은 김성은 부대는 통영과 거제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견내량 해역으로 출동했다.

북한군은 곧이어 도착한 후속부대 약 300명과 합세하여, 통영 해안선과 남망산, 망일봉, 여황산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다음날인 17일 새벽 4시경, 김성은 부대는 거제도에서 작은 목선을 빌려 통영을 탐지했다.

“통영 읍내에 침투한 적의 병력은 650명 정도이며 박격포와 중화기를 보유하고 있고, 아직 용남면 장평리와 견내량 방면에는 출현하지 않았다.”는 정찰대의 보고를 받은 김성은 대장은 “통영에 상륙해 적을 섬멸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했다. 잘록한 통영반도의 입구인 원문을 묶으면 적이 통영 읍내에 갇히게 되고, 적보다 병력이 적은 해병대로서는 갇힌 적을 기습해 섬멸하는 것이 거제 서해안 방비보다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통영은 미 공군이 폭격할 것이니 예정대로 거제로 상룩하라.”는 응답이 왔는데도 김성은 부대장은 세 차례나 통영상륙작전을 허락해 달라고 해군본부에 교신을 보냈다.

드디어 저녁 5시경 “통영상륙작전 승인”이 떨어졌다. 미군의 통영 폭격도 취소됐다.

김성은 부대장은 3개 부대로 병력을 나누어 통영상륙작전을 실행하기로 하고, 적의 눈을 통영항으로 돌리기 위해 해군부대와 협력, 통영항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공군도 로켓탄과 기총소사로 공격하며 통영작전을 지원했다.

저녁 6시, 선임부대인 2중대가 장평리 견내량 부두에 상륙했다. 견내량은 수심이 얕아 함정이 접안할 수 없었다. 2중대는 고기잡이 배인 통통배(똑딱선) 2척에 나눠 타고 장평리에 상륙, 견유마을에 제1교두보를 확보했다. 이어 3중대와 유방고개에 제2교두보를 확했고, 7중대와 중화기중대, 본부중대가 차례로 상륙을 완료했다.

3중대 참전용사는 “똑딱선 한 채에 30명이 빽빽하게 앉았다. 해안까지 배를 댈 수가 없어 허리까지 물에 잠긴 채 상륙했다. 물에 젖은 채 야산에 올라 7시쯤 무덤가에서 주먹밥을 먹고 다시 이동했다.”고 증언했다. 1960년에 보고된 스미스의 ‘통영작전’에는 “약 20대의 어선으로 장평의 오래된 나루터로 조용하게 상륙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이 장평에 상륙하고 있던 저녁 7시, 통영 앞바다는 해군함정들이 일제히 포격을 가하며 적의 이목을 통영항으로 주목시켰다.

지게를 지고 탄약을 운반하는 모습(국가기록원) 통영상륙작전 당시의 사진은 아니나, 김성은 장군의 증언에 의하면 이와 같이 민과 군이 협력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적들은 우리 군이 통영항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판단, 전 병력을 통영항 해안선으로 집중시키고는 맹렬하게 교전했다. 남망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북한군도 통영항으로 내려와 해군과 교전했다.

17일 밤, 북한군은 밤새 이어진 해군의 포화 속에서 갈팡질팡했다.

18일 새벽, 3개 조로 나뉘어 상륙한 해병대는 무사히 목표지점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2중대는 원문고개와 인접한 곳에 방어진지를 구축했으며, 3중대는 미나리골산, 7중대는 망일봉을 점령했다. 중화기중대와 본부중대도 용남국민학교에 지휘소를 설치했다.

특히 망일봉을 점령한 7중대는 해병대 상륙작전을 눈치채고 다시 망일봉 고지를 사수하기 위해 올라오는 적군과 교전을 벌였다. 두 번째 교전이 있었던 7시 40분 경에는 아침해가 망일봉으로 떠올랐다. 적군은 눈부신 태양빛을 마주보며 산을 올라오고 있었고, 아군은 태양을 등지고 내려다보며 조준사격을 했다.

망일봉 전투의 두 차례 교전으로 적병 100명 가운데 50명이 사살됐는데, 대부분 어린 소년병들이었다. 결국 적은 망일봉 고지를 포기하고 멘데마을 해안과 북신동, 토성고개 쪽으로 흩어져 도주했다.

정오가 넘어가면서는 살아남은 적이 민가로 도주하여 군복을 벗고 민간이 복장으로 변장한 뒤 탈출구를 찾기에 급급했다. 그래서 이날 오후의 전투는 교전이라기보다 ‘수색전’이었다. 민가를 뒤지며 수상한 사람을 색출, 적병을 가려내야 했다. 마침 해군 함정도 포탄을 거의 소모하여 지원사격을 할 수 없게 됐다.

밤 11시쯤 해군방위대 1중대 병력과 탄약을 실은 함선이 장좌도 부근에 도착했다. 탄약은 각 중대에서 차출된 20~30명의 운반병이 바다에 들어가 탄약상자를 어깨에 메거나 머리 위로에 이고 운반했다.

19일 오전 10시경 통영시내에 남은 적들에 대한 소탕작전이 거의 완료됐다. 시내를 빠져나간 적들은 명정고개를 넘어 작은개와 큰개, 우럭개를 통해 해상 탈출을 시도했다. 주민을 총으로 위협, 배를 강탈한 북한군은 옷과 무기를 배에 싣고 헤엄쳐서 배를 밀며 용호리로 건너갔다.

8월 17일 새벽 1시 북한군 손에 넘어간 통영은 19일 10시 시가지 탈환을 완료함으로써 2일 9시간 만에 되찾았다.

그러나 북한군은 죽림 광산에 본부를 구축하고 매일 밤마다 원문을 공격해 왔다. 캄캄한 야밤에 몸과 몸이 부딪치는 백병전이 벌어졌다. 참전용사들은 “왼손으로 상대의 머리를 만져 적군임을 확인하고 오른손의 대검으로 찌르는” 무서운 전투를 했다고 회고했다.

너무 어두워 아군과 적군을 구분할 수 없는 가운데, 북한군의 머리가 대부분 짧은 까까머리였기에 직접 손으로 만져가며 구분을 했다는 것이다. 사격전도 치열해 시뻘겋게 달궈진 총구를 식히기 위해 소변을 보는 일도 있었으며 포신에 담뱃불을 붙여 피웠다는 일화가 전하기도 한다.

이 원문고개 공방전은 9월 11일까지 계속됐다.

통영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해병대 중 2, 3중대는 10일 오전 통영에서 철수하여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으며, 나머지는 9월 23일 진해해군방위대와 임무를 교대하고 통영항을 떠났다.

통영상륙작전에는 김성은 대장이 이끄는 해병대를 중심으로, 해군 진해 방위대와 통영지구 청년방위대, 초계함 3척, 소행정 5척, 수송함 2척이 참여했으며, 공군 T-6전투기 편대와 F-51머스탱전폭기 편대가 참여했다.

<이 글은 ‘통영상륙작전 7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에서 김일룡 통영문화원장이 발표한 ‘해병대 통영상륙작전’을 기반으로 재구성하였습니다.>

70주년 기념으로 발간된 도록 <귀신잡는 해병 통영을 넘어 대한민국을 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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