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통영거제시민모임 상임대표 송도자

광복절이 다가오면 송도자 대표(59)는 바빠진다. 광복절 하루 전날인 8월 14일이 세계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이기 때문이다. 기림일에는 평화와 인권을 다시 생각해보는 다양한 행사를 주관한다. 올해는 코로나19로 행사 규모가 대폭 축소되었지만, 그에 따라 자원봉사자의 손길도 줄어 송 대표는 더 분주하다.

“20년 가까이 이 일을 하고 있는데, 올해가 가장 힘듭니다.”

꼬여 버린 학사 일정에, 윤미향 의원의 정의연 문제까지 불거지면서 송도자 대표는 어느 때보다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수많은 신문이 언론중재위의 명령에 따라 정의연 기사에 대해 정정보도를 내고 있지만, 대중들은 실추된 이미지만 기억할 뿐 그 기사가 잘못된 것이었다고 따져보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그냥 등을 돌려버리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송도자 대표의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통영거제시민모임(통거모)도 직격탄을 맞았다. 시민들의 참여도, 모금도 최저점을 찍었다.

“그렇다고 이 일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위안부 문제는 역사, 여성, 인권, 평화의 문제입니다. 아직 제대로 된 사과도 받지 않았으므로 계속 기억하고 계승하고 알려야 합니다.”

▲故 김복득 할머니가 기부한 2천만원은 경남일본군위안부역사관의 씨앗이 되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한분, 두분 떠나시면서 통거모는 시민들의 관심속에서 멀어지고 있다. 재작년 경남 마지막 생존자였던 김복득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시자, 사람들은 “이제 문을 닫는 것이냐?” “앞으로 뭐 할거냐?” 하는 질문을 송 대표에게 했다. 안 그래도 어머니처럼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던 김복득 할머니가 떠나셔서 마음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송도자 대표는 ‘생존자가 돌아가시면 위안부 문제가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일반적인 인식들과 마주하며 더 절망했다.

“지금 남아 계신 어머니들 평균 연세가 92세십니다. 앞으로 5년만 지나도 거의 어머님들은 안 계실 거라고 봐야 합니다. 피해자 직접증언에 의존하지 말고 이제 우리가 증언자가 돼야 할 때라는 말이지요.”

송도자 대표는 “90이 넘으신 노인들을 모시고 다니며 계속 피해의 증언을 하게 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폭력”이라고 말한다. 이 아픈 역사를 기록하고 잊지 않기 위한 몸부림은 생존자가 없어진다고 함께 소멸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송도자 대표가 처음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난 것은 90년대 중반이었다. 그 무렵은 한국정신대연구소가 설립되고 위안부 문제가 막 드러나기 시작하던 때다. 지역마다 신고센터가 설치되고 피해자들이 등록하기 시작하던 때, 정신대연구소의 연구원들이 피해자 기록을 하러 통영을 오게 됐다. 아는 선배의 부탁으로 송도자 대표는 그 연구원들의 통영 안내를 맡게 됐다.

남의 일처럼만 여기던 위안부 문제가 바로 내 고향 통영의 문제인 것을 알게 되고, 그분들이 고향에 돌아와서도 2차, 3차의 피해를 입으며 살고 계신 것을 알게 되면서, 송도자 대표는 그분들의 딸노릇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어머니들이 모두 자식을 낳지 못하셨어요. 그래서 모시고 밥 먹으러 가고 좋은 데 모시고 가면서, 딸노릇을 하기 시작했지요.”

남망산공원에 세워진 정의비

어머니들의 인생이 이대로 묻히게 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다가, 2002년 송도자 대표는 몇몇 뜻있는 사람들과 통거모를 결성했다. 당시 꽃집을 운영하고 있던 송대표는 시민단체와 꽃집 일을 병행했다. 그러나 점차 일이 많아지고 교육장소도 필요해지면서 항남동 김상옥 동상 옆 건물 3층에 센터를 마련하면서는 꽃집을 그만뒀다.

생업을 그만두고 시민단체장으로 살아가는 일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대표의 인건비가 책정은 돼 있지만 단 한 번도 월급을 받은 적이 없다. 오히려 빚을 내 운영비를 충당해야 할 만큼 시민단체의 살림살이는 어렵다.

그러나 경제적인 어려움보다 더 괴로운 건, 통영이라는 지역의 폐쇄성이다.

“2013년 정의비를 세울 때 우리는 가장 역사성이 있는 강구안에 세우기를 바랐습니다.”

강구안은 경남의 여성들이 집결해 부산으로 떠나는 중간거점이었다. 위안부 피해자가 경남, 특히 통영에 많은 것도 이곳이 부산으로 가는 항구였기 때문이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충무의 여관에 2~3일씩 묵으면서 인원이 차기를 기다렸다가 부산으로 이송됐다고 한다.

그러나 지역 문화계 유지들의 반발이 거셌다. 결국 통거모가 정의비를 세우고 싶었던 자리에는 다른 조형물이 놓였다. 두 번째로 하고 싶었던 곳은 한산대첩 광장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어디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광장에 위안부 상을” 하는 지역 유지들의 반대에 부딪쳐야 했다. 결국 정의비는 남망산 공원으로 올라갔다.

2015년에는 전국 최초로 거제통영 지역의 위안부 피해 추정자 전수조사를 했다. 눈뜨자마자 밖으로 나가 발품을 팔며 어머니들의 증언을 취합한 결과 80여 명의 새로운 피해자를 찾을 수 있었다.

“현재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된 사람은 240명입니다. 최저 4~5만, 최고 20만 명으로 추정되는 일본군위안부 중 조선여성이 70%였을 텐데, 그들의 역사를 기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송 대표는 지금 ‘경남지역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을 설립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몸이 망가져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할 수도 없고, ‘환향녀’처럼 바라보는 당시의 시각 때문에 음지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던 그분들의 아픔이 오늘 송도자 대표를 일어서게 하고 있다.

학생들은 송대표의 시민운동에 큰 힘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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