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류태수

“장마와 장마 사이에 해가 쨍 뜨면 물안개가 좍 올라옵니다. 그런 날 특별한 사진이 나오지요. 마음에 드는 사진을 얻었을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통영의 순간을 포착하는 행복 때문에 류태수 사진작가(70)는 지금껏 통영의 역사 기록자로 살고 있다.

“오늘은 별것 아닌 것이 세월이 흐르면 가치 있어지는 것이 사진입니다.”

그가 사진과 함께 역사 기록자의 삶을 살게 된 것은 아버지 류완영 선생 덕이다. 통영에 사진을 처음 들여온 아버지는 어린 류태수에게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과 역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류태수 작가의 아버지 류완영 작가

류태수 작가가 아장아장 걸어다니던 때, 류완영 선생은 개천예술제의 전신인 영남예술제에 입선하면서(1953) 사진작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시작했고, 통영 최초의 예술사진전(1954), 통영 최초의 개인 사진전(1955) 해방 후 우리나라 최초의 인상 사진전(1957)을 열며 독보적인 사진예술가로서의 걸음을 걷고 있었다.

류태수 작가는 아버지가 가보처럼 보관하셨던 이때 사진전의 방명록을 아직도 갖고 있다. 초정 김상옥이 표지를 그린 그 방명록에는 유치환, 김춘수 등 그 시대를 풍미했던 예술가들의 친필이 쓰여 있다.

“통영 최초의 사진전 방명록에 김춘수 시인은 ‘렌즈에 피가 흘렀도다.’라는 말을 적어놓았습니다. 전시가 끝나고 아버지께서는 ‘이 전시가 통영사진발전의 씨앗이 되기를 바란다.’ 는 요지의 글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통영사진협회를 결성하고 평생 통영을 기록하며 사셨습니다.”

류태수 작가의 집에는 100년이 넘은 카메라를 비롯, 사진 박물관을 차려도 될 만큼 다양한 카메라들이 수백 대다. 아버지가 쓰시던 목형카메라부터 히틀러 문양이 새겨진 제1차세계대전 당시의 카메라도 있다.

아버지 덕에 류태수 작가는 상이 거꾸로 맺히는 목형카메라부터 필름카메라 시대를 지나 디지털 카메라까지, 역사 속 모든 카메라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됐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암실에서 일을 돕기도 하고 시골마을에 사진 촬영을 다니기도 하며 사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아버지 류완영 선생은 도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열두 살 나이에 혼자 일본으로 넘어가, 오사카에서 처음 카메라를 보고 독학으로 사진을 배웠다.

1943년 대동아 전쟁이 한창일 때 고향으로 돌아온 스물다섯 살 류완영 선생은 통영시장(중앙시장)에서부터 사진사로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해방이 되는 해 ‘유영(柳營)사진관’을 개업하고, 1962년에 충무사진 동우회를 결성하여 초대회장을 지냈다. 1965년에는 한국사진협회 충무지부 창립추진위원장을 맡아 오늘의 한국사진작가협회 통영지부의 모태가 되는 충무지부를 만들었다. 통영 최초로 신식결혼식을 하는 충무예식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아버지를 존경한 류태수 작가가 서라벌예대 사진학과에 들어가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서라벌예대 교수님들은 “충무 류완영이 아들이라며?” 할 정도로 아버지와 교분이 있던 작가들이었고, 류태수 작가는 아버지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더 열심히 공부를 해야 했다.

“저에게는 스물다섯 살이 참 중요한 해입니다. 제대해 내 손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고, 사진협회의 회원으로 진짜 활동을 시작한 때이니까요.”

1976년 개천예술제 사진공모전에서 특선해 개천예술상을 받은 이십대의 류태수 작가는 크고 작은 상을 받으면서 당당히 사진작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 세기가 지나는 동안 아버지의 뒤를 이어 통영의 아름다운 자연과 역사를 기록했다.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1997년 ‘통영의 어제 오늘’이라는 책을 펴낸 것이다.

“아버지의 사진을 비롯해 1950년대 통영시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작가의 이름을 밝혀 싣고, 그와 똑같은 각도에서 통영사진을 찍어 책으로 펴냈습니다.”

50년의 간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 귀중한 사진집을 만들고 알리는 데 류태수 작가는 당시 돈 2천만원을 쏟아부었다.

“그 돈으로 땅을 샀으면 부자가 됐을 겁니다.”

그 일을 두고 그는 ‘통영 시민으로 밥값은 했다.’고 말한다. 지금은 모두 흩어져 소장본 한 권만 남았지만, 그렇게 기록해 놓은 덕에 통영의 역사가 고스란히 간직됐다.

통영에서 사진 기록자로서의 역사는 한산대첩축제의 역사와 같이 간다. 시민의 자발적인 힘으로 시작된 한산대첩축제를 기록하는 것이 사진분과의 주요업무였기 때문이다. 류태수 작가는 문예부장, 기획위원 등으로 일하다가 2007년부터는 8년 동안 통영한산대첩축제 집행위원장을 지냈다.

그는 지금 사진작가로서의 활동에 버금가게 이순신 강사로 활약 중이다. 작년에는 ‘서울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도 했다.

“글쓰고, 사진 찍고, 좋아하는 것 마음껏 하며 살고 있으니 제가 살고 있는 이곳이 천국입니다. 돈 탐, 자리 탐을 안 하니 행복한 인생 아닙니까.”

그는 오늘도 무욕(無慾)의 하루를 렌즈에 담는다.

통영 최초의 사진전 방명록에 적힌 김춘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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