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옻칠 전통을 예술로 승화시키다
천년 옻칠 전통을 예술로 승화시키다
  • 김선정 기자
  • 승인 20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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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옻칠미술관 김성수 관장

“내년이면 옻칠 입문 70년입니다.”

이제는 ‘옻칠’ 그 자체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통영옻칠미술관 김성수 관장(85)은 코로나19로 모든 걸음이 멈춰선 시간, 옻칠 인생을 되돌아보고 있다.

처음 옻칠을 배울 때의 설렘이 어제 일처럼 또렷한데, 어느새 7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1951년, 열여섯 살이었던 소년 성수는 통영에 처음 생긴 ‘경남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1회 입학생이 됐다.

“친척 아저씨가 권유하기를 ‘평생에 보지 못하던 대단한 사람들이 선생으로 온단다. 이런 기회가 없다.’ 하셨지요. 집안에서도 맏이니까 기술 배우는 게 좋겠다 해서, 뭔지도 모르고 입학했습니다.”

이것이 김성수 관장의 옻칠 인생 첫발이었다. 김성수 소년은 그곳에서 김봉룡, 유강렬, 장윤성, 이중섭 같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만났다.

“재미있었어요. 디자인, 제도, 옻칠, 나전 뭐 하나 빠질 데 없이 교육을 시켜주었지요. 당시에는 그렇게 유명한 사람들인지 몰랐죠.”

통영옻칠미술관에 있는 김성수 관장의 옻칠회화 작품

때는 바야흐로 6.25 전쟁 중. 서울에서는 포탄이 오가는 공방전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통영은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무렵부터 장인들은 먹고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전통옻칠을 가르쳤지만, 고가의 옻액으로 수십번의 칠과 건조를 반복해야 하는 옻칠의 자리를 값싼 캐슈가 빠르게 잠식해가고 있었다. 화학칠인 캐슈는 한두 번만 바르면 완벽히 칠이 되는데다 값도 비교할 수 없이 쌌다. 가난한 나라의 급한 재건에는 맞춤한 재료였는지 모르지만, 그런 효용성 앞에서 우리 전통옻칠은 무너져내렸다.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를 졸업한 김성수 소년은 김봉룡 선생의 소개로 부산에 있는 한국공예협동조합 총회장인 김영호 씨의 집에 머물며 주경야독했다. 당시 김영호 회장은 국내 최대의 나전칠기 공장과 백화점 내 매장을 갖고 있었다. 부산에서 가장 큰 미화당 백화점이었다.

“당시에는 부산에 미군이 많았어요. 그 사람들이 선물하는 것이 다 나전칠기 제품이었지요. 용이 그려진 명패, 앨범 표지 등이 주 상품이었어요. 디자인을 배웠으니까 영어명패를 쓰기도 하고 나전칠기 공장이 어떻게 운영되는지도 볼 수 있었지요. 10년 배워도 못 배울 것을 한꺼번에 뭉쳐서 6년 짧게 배운 셈이에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김봉룡 선생이 찾아왔다. 다시 통영으로 돌아와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강사가 되어 달라는 것이다. 전쟁이 끝나자 강사들이 서울로 올라간 데다 양성소 사정은 재료비를 댈 수도 없이 가난해져 있었다.

20대가 된 김성수 청년은 7년 동안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의 강사가 됐다. 자개가 귀해서 얇은 금속을 오려가며 연습하는 가난한 학교였지만, 그런 만큼 오히려 아이디어가 창출되는 기회이기도 했다.

1963년, 28살이 된 김성수 청년은 서울로 올라가 창작생활을 시작했다. 나전칠기를 하는 친구 집에서 도안을 그려주고 얹혀사는 가난한 작가였지만, 그는 그 해부터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내리 4번 특선을 했다. 그중 1965년에는 공예분과 대상을 받았다. 대한민국을 통틀어 보기 드문 성적이다.

여러 대학에서 강의 요청이 쇄도하는 가운데, 그는 1966년 홍익대 강사가 됐다. 그때부터 1998년까지 32년 동안 그는 숙명여대 미술대학 교수, 홍익대 미대 교수, 중국 칭화대 미술대 객좌교수 등을 두루 역임했다.

지난해 옻칠회전시회에서

숙대에 재직하던 1973년에는 튀니지 정부의 초청으로 국립공예청교육관에서 전통공예를 가르쳤다. 준외교관 신분으로 3년 동안 지낸 이 기간에 동남아를 비롯해 유럽, 홍콩, 대만을 모두 돌아보면서 그는 글로벌한 시야를 갖게 됐다.

나이 63살이 됐을 때, 그는 돌연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 전통 나전칠기를 만들어 한국에 역수입해야 한다는 복안으로 이민을 간 것이다.

미국에서 한 전시회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옻칠’의 영어 표기를 ‘래커(lacquer)’로 하자, 우리 옻칠의 특수성이 살아나지 않았다. 김성수 관장은 2002년 미주 이민 100주년 기념 옻칠회화 전시를 하면서 ‘ottchil’이라는 표기를 만들었다. 옻칠 자체를 고유명사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김성수 관장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우리 전통 옻칠을 현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교수 시절 내내 그는 가짜 나전칠기와 싸워서 쇠락해가는 천년의 전통 나전칠기 공예를 다시 부흥시키기 위해 애썼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옻칠회화’다. 전통옻칠이 현대 속에서 가치를 발휘하려면 예술로 고급화되어야 한다고 여겼던 그의 손에서 전통옻칠은 예술로 변모했다.

2006년, 그는 고향 통영으로 돌아와 옻칠미술관을 열었다. 15억 원의 사재를 털어 세운 국내 유일의 옻칠전문 미술관이다. 이곳에서 그는 국제 규모의 옻칠회화 전시와 세미나 진행을 토대로 세계의 작가들이 경남과 통영을 한국 옻칠의 허브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옻칠 입문 70주년을 앞뒀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바쁩니다. 사실 이 70년은 옻칠이 사라진 역사이기도 합니다. 캐슈가 거대한 시류를 타고 옻칠을 밀어내는 역사였으니까요.”

평생 가짜옻칠과 싸운 김성수 관장이 있었기에 천년의 옻칠미술 전통은 오늘날 예술로 복원되고 있다.

지난 2018년 자랑스런한국인대상 (전통옻칠예술 부문) 시상식에서<br>
지난 2018년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 (전통옻칠예술 부문) 시상식에서
통영옻칠미술관에 있는 김성수 관장의 옻칠회화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