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박동열

두 살 때 허리를 다쳐 걷지 못하는 소년이 있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학림도에서 태어났지만, 걷지 못하는 소년에게 아름다운 자연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통영에서 배로 10분 거리밖에 안 되는 섬이었지만, 병원을 다니려면 뭍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소년으로 인해 가족들은 통영으로 이사했다. 육로로 병원에 갈 수 있다는 것뿐, 소년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걸을 수 없었다.

여덟 살, 다른 친구들은 학교에 가는 나이였지만 소년은 고스란히 누워 긴긴 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때 소년의 가족이 살던 집에는 한 화가가 살고 있었다. 소년의 집은 위채, 화가의 집은 아래채였다.

소년은 날마다 마루에 누워, 아래채의 화가 아저씨가 그림 그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화가의 캔버스에서는 코발트블루 빛 통영 바다가 넘실거리는가 하면, 저마다 자기만의 이야기를 담은 오방색 섬들이 방실거리며 바다를 떠다녔다. 멈춰진 시간을 살고 있던 소년은 화가의 그림 속에서 통영의 바다와 섬을 만났다. 소년은 화가의 절제되고 단조로운 선과 마술 같은 색채에 매료됐다.

“운명이었지요. 매(계속) 누워서 그림 그리는 것 쳐다보면서 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으니까요.”

소년의 이름은 박동열, 그는 정말로 자라서 통영의 바다를 멋지게 표현하는 화가가 됐다. 어릴 적 그에게 꿈을 주었던 화가 아저씨는 한국의 피카소 전혁림 화백(1916~2010)이다.

박동열 화가는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10년 동안 전혁림 화백과 같은 집에 살았다. 전혁림 화백이 그림과 색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면 소년 박동열은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곤 했다. 제대로 그림을 배운 것은 아니지만, 대화가의 그림을 보고 자랄 수 있었던 건 큰 행운이었다.

어린 박동열은 영국선교사들이 소아마비 등을 치료하던 국립마산병원 소아병동에서 3년 동안 치료를 받은 끝에 걷기 시작했다. 13살 무렵이었다.

“열여덟 살 때 나전칠기 공장에 들어가게 됐어요. 당시 통영에는 한 집 건너 한 집에 나전칠기 공장이 있었지요.”

열여덟 살이 한 몫의 성인으로 여겨지던 때, 동열은 통영의 가난한 집안 아이들이 모두 걷던 길로 들어섰다. 이에 더해 친구들보다 늦어진 중등과정 공부를 하기 위해 밤에는 충무고등공민학교에 다녀야 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꿈은 마음속에 꼭꼭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푸른 바다가 어느 날 더 못 견디게 푸르를 때, 해가 떠오를 때 순간적으로 빛이 바다를 감싸안을 때, 청년 동열의 가슴은 그 아름다운 심상에 두방망이질쳤다. 때로는 그 대자연의 빛을 캔버스에 담아보려고 혼자 붓을 들고 밤을 보내기도 했다.

“1980년 4월 첫 주였어요. 전혁림 선생님을 찾아가서 제 그림을 보여주며 ‘제가 그림을 그려도 되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전혁림 선생님이 ‘그래 그려봐라.’ 하셨지요.”

스물다섯 살의 청년 동열은 그때부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그림을 그렸다. 그 무렵 함께 꿈을 나눈 친구가 있었다. 제일은행 통영지사에 발령받아 내려온 친구 김반석 화가다.

“지금 동호동 대풍관 자리쯤에 살았는데, 거기서 그 친구와 서로 의지해 가면서 그림을 연마했지요.”

스물다섯과 스물여섯인 두 청년은 화방 주인에게 물감의 특성을 물어가며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다. 석고상을 놓고 데생 연습도 했다. 거창한 미술이론도 유능한 교사도 없었지만, 그들의 교실에는 열정과 우정이 뜨거웠다.

결혼하고 딸 둘을 낳아 기르는 사이 통영에서는 나전칠기의 열풍이 수그러들었다. 마흔세 살이던 1998년, 그는 칠기 일을 접고 전업작가가 됐다. 당장은 생활이 빠듯해지기도 했지만, 매사에 불평이 없는 가족들은 주어지는 대로 맞춰 가며 박동열 화가를 응원했다.

그리고 22년, 그는 이제 통영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이 됐다. 10번의 개인전을 했고 일본 사야마시 초대전, 홍콩, 광저우, 상해 아트페어 등 세계적으로도 발을 넓히고 있다.

올해 1월에 전시를 했던 사천 우주미술관에서는 전시 제목을 ‘위대한 통영화가 박동열초대전’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지난 25일 KBS는 ‘네트워크 공동기획 문화스케치’에서 박동열 화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집중 조명해 방영하기도 했다.

“바다가 품은 무한의 색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름난 화가보다 최선을 다해 그림 그리는 화가로 남고 싶습니다.”

코로나19로 모든 전시회와 공연이 멈춘 이 시간에도 박동열 화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 9시에 작업실에 나와 그림에 매진한다.

구도자가 신을 찾듯, 박동열 화가는 절절한 마음으로 빛과 빛이 부딪치는 순간의 바다를 포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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