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식 경상대학교 명예교수

정한식 경상대학교 명예교수

방황의 끝은 출가(出家)였다. 절 입구에서 부터 스님과 동행하였다. 소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청아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왜 중 되려고 하느냐의 첫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난 그저 아무 생각도 없이 산문(山門)에 든 것이다. 열 명 중 두 명 정도가 중이 되는데 자네는 잘 안될 것 같다는 종무소를 지키는 스님의 말씀에 맥이 풀리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결국 속세(俗世)에서 아옹다옹하면서 사는 것이 나의 삶이 되었다. 할아버님. 할머님.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형님까지 고향의 산사 금정사에서 49제를 올렸다. 칠일마다 대웅전에서 합장하고 스님의 독경을 들으며 극락에 들어가시길 기도하였다. 그러한 시간 동안 깊었던 슬픔도 내려놓았다. 마지막 제를 올리고 그곳을 떠나오는 날에는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극락 가는 절차라도 제대로 챙겨드리는 것이 후손된 도리로 생각하였다. 그리움도 사랑도 그곳에 남겨 두고 발길을 돌렸다. 이제는 극락왕생하여 서로 만나서 편안한 저승 살이 하실 것으로 믿는다. 난 그길로 간간히 절을 찾으며 부처님의 가피(加被)를 받고자 욕심을 부리기도 한다. 불경 하나도 제대로 암송 못하고, 불전 함에 시주 돈 넣는 것도 인색하고, 공양미도 제대로 올리지 않으면서 속세의 온갖 욕심을 다부린다. 나는 그동안 받을려고만 애쓰는 속세의 사람이 되었다. 불자라는 명칭을 쓰기에는 솔직히 부끄러움이 크다. 그래도 대웅전에 들어서면 연화 미소를 주시는 부처님의 모습에 위안을 얻기도 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성철 큰스님이 열반에 드셨을 때 이승에 남겨 두신 덕지덕지 꿰맨 가사장삼 한 벌과 고무신 한 켤레를 보면서 그분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언어를 듣는 듯하였다. 아무말씀을 나에게 주시지 않았는데도 큰스님을 존경의 대상으로 늘 마음에 품고 있다. 솔직히 삼천 배하고 스님 뵙는 것은 그때 이미 포기하였다. 백팔 배도 못하는 내가 삼천 배를 한다는 것은 나를 만나 주시지 않겠다는 큰스님의 마음이려니 자위하고 해인사 퇴설당으로는 발길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은 스님이 남긴 법문을 접하면서 스님이기 이전에 스승의 모습이 늘 아른거린다. 처절하게 공부하고 극한으로 검소하게 살면서 기도 정진에 몰두한 그분의 지난 삶은 인류에 남긴 큰 업적임에 분명하다. 통영에는 미륵산이 통영의 바다 쪽에 버티고 있으니 미륵불의 자비 속에 사는 것이 분명하다. 이곳에 살면서 마음이 허전할 때 찾아가는 절은 미륵산 중턱에 있다. 절로 올라가는 길을 30분 정도 걸으면 등에는 약간의 땀이 나고 다리가 뻐근하기 시작한다. 그때쯤 나타나는 것이 절이니 위치로서 나에게 안성맞춤이다. 쉬고 싶은 곳에 부처님이 있는 것이다.

온 세상에 부처님의 자비심이 넘쳐 힘들었던 시간을 모두 광명으로 바꾸어 주십시오. 정성으로 두 손 모아 부처님 오신 날을 봉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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