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의 오늘을 사는 젊음 하나
통영의 오늘을 사는 젊음 하나
  • 김선정 기자
  • 승인 2020.03.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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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여객 안성진 기사

통영신문에 제보가 하나 들어왔다.

“코로나19로 힘든 시기에 친절하고 훈훈한 기사님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하는 미담 제보였다.

지난 3월 6일 오전 8시에 출발하는 서울행 버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앞자리에 앉았던 승객이 뒷좌석으로 자리를 옮겨서 소변을 눈 사건이 발생했다.

제보자는 ‘뒤에서 물바다가 되어 앞좌석 쪽으로 흘러오는 난장판 속’이었다면서 이렇게 진술했다.

당시 사건이 발생한 서울행 버스안

“근데 더 놀라운 것은 버스 기사님께서 아무런 불평 없이 버스 바닥 전체에 흐르는 오줌 물을 구석구석 닦고 정리하시면서 오히려 승객 한분 한분께 불편이 없을까 걱정하고 챙기셨어요. 이 상황에서 한마디 불만 없이, 차에서 실례하신 분이나 같이 타신 승객들에 대한 배려가 너무 고맙고 아름다워서 제보합니다.”

대한여객 통영영업소 임성근 소장은 사건 속 운전기사를 “말이 없지만 아주 성실하게 근무하시는 기사님”이라며 안성진(39) 씨의 연락처를 전해 줬다.

안성진 씨는 “그때 어떤 어머님이 같이 차 바닥을 닦으며 도와주셨는데 그분이 제보하셨나 봐요.” 하며 쑥스러워했다. 그 여자 승객은 내릴 때 어깨를 두드리며 “수고하셨다.”고 인사하며 가셨다 한다. 그러나 제보자는 다른 남자 승객이었다. 실례를 한 그분의 옷이 젖지 않았기 때문에… 차 안의 승객들이 기사님의 친절한 태도에 더 감탄한 것이다.

“황당하긴 했지요. 이미 그분을 위해 다른 휴게소에 진입하려던 때였거든요. 남성이었기 때문에 진짜 급하다 하시면 길가에 대드릴 수도 있었는데 그냥 뒷자리에서 하셨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짜증을 내면 그분이 얼마나 무안하시겠어요? 다른 손님들도 불안하실 테고요.”

승객들이 입을 모아 칭찬한 안성진 씨는 2017년부터 대한여객 기사가 되어 통영과 서울을 오가고 있다. 그 전에는 조선소에서 일했다.

통영에서 15년째 살고 있지만, 원래 그는 부산에서 태어나 자랐다. 대학에서 ‘조선과’를 전공하고 2006년 SLS조선(구.신아조선) 사외제작 관리팀에 입사한 것이 그가 통영에 오게 된 계기다.

당시 SLS조선은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2008년 11월 말 기준 수주잔량은 세계 16위였다. 그러나 2009년부터 불황이 시작됐고 결국 SLS조선은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성진 씨는 2011년에 회사를 그만뒀다.

잠시 공백 기간이 있기는 했지만, 그는 4년치 발주를 받아놓고 있던 통영 SPP조선소에 입사했다. SPP조선소는 중형 석유화학운반선(PC)에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러나 2013년부터 물량이 떨어지기 시작한 데다 신규 계열사 투자 실패 등으로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성진 씨의 마지막 조선소는 성동조선이었다. 2014년 성진 씨는 판넬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해 성동조선은 LR2 탱커 수주잔량 세계1위를 기록하며 마지막 빛을 발했지만, 이듬해부터 수주를 받지 못하고 추락하기 시작했다.

“회사 분위기가 아주 뒤숭숭했지요. 2016년에 희망퇴직을 두 번 했는데 저는 두 번째 희망퇴직 때 그만두었어요.”

저 사람이 나가면 나는 남을 수 있을까 눈치를 보는 분위기, 위에서 조용히 불러 ‘희망퇴직을 하지 않고 잘리면 그나마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식의 사실상 권고사직을 종용하는 분위기…. 일도 되지 않고 마음만 졸이는 시간이었다.

“제가 아이가 셋이어서 마음이 많이 무거웠어요. 그때는 아이들이 더 어렸기 때문에….”

당시 아이들은 5살, 3살, 1살이었다. 성진 씨는 살벌한 회사 분위기 속에서 희망퇴직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그에게는 대학시절 따 놓은 대형운전면허가 있었다. 성진 씨는 버스자격증을 구비하면서 이직을 준비했다.

“2016년 12월에 퇴직하고 2017년에 대한여객에 입사했습니다. 열흘에 한 번씩 서울에서 2박을 해야 하는데 그럴 때 애들을 볼 수 없으니까 어려움이 있지만, 일에 대한 스트레스는 훨씬 적지요. 그냥 저만 운전을 잘하면 되니까요.”

조선소의 일은 모든 조직이 유기적으로 돌아가야 했다. 한쪽에서 작업량을 못 맞추면 도미노처럼 다른 부서에 지장을 초래했고, 공장에서 밤샘작업을 하는 날에는 퇴근 후에도 수없이 카톡이 왔다. 하지만 정기적인 출퇴근 시간이 있어 아이들과는 훨씬 더 많이 놀아줄 수 있었다.

성진 씨에게 삶의 희망이 되어주는 아이들

9살, 7살, 5살이 된 아이들은 요즘 코로나19로 학교도 어린이집도 가지 않는다. 아빠까지도 감차가 많이 돼서 쉬는 날이 늘었다. 통영-서울간 왕복도 10회에서 6회로 줄었으니 그만큼 쉬는 날이 많아진 것.

철없는 아이들은 아빠가 집에 있다고 좋아하지만, 운행일자에 따라 월급이 달라지는 성진 씨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감염병 때문에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는 거니까 운수업에도 특별 고용유지 지원금을 주면 어느 정도 월급 보전이 되지 않을까? 이런 기대를 하다가도 모두가 힘들어하고 있는 이 시국에 어떻게 될는지 모른다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성진 씨의 이야기는 2020년 통영을 그대로 보여준다. 연고 하나 없는 통영에 대학을 갓 졸업한 스물네 살 성진 씨가 오게 된 건 오직 ‘조선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과 그 가족들이 낯선 지방이었던 통영에서 뿌리를 내리고 10여 년을 살았다.

성진 씨가 성동조선에 들어갔을 때 직원은 1500명이었다. 그러나 조선소의 몰락과 함께 젊은이들은 갈길을 잃고, 다른 지방을 찾아가거나 다른 직장을 찾아 나섰다. 성진 씨는 통영이 살아나려면 기업을 유치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할 곳이 있으면 젊은이들이 통영을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십대의 그가 통영에 자리를 잡게 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