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기념 특집2. 죽음을 각오한 기생들의 독립운동

원문고개에 있는 3.1운동 기념비

1919년 4월 3일 <매일신보>에는 ‘통영소요기생, 징역 6개월에, 부산의 소요공판’이라는 기사가 났다. 통영에서 기생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기사다.

삼일절 100주년에 맞춰 국가기록원이 발간한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에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른 기생 이름이 여럿 등장한다. 수원 기생조합 김향화를 비롯해 해주 기생 문응순, 김해중월, 이벽도 통영 기생 정막래, 이소선 등이다.

통영의 기생들은 권번 조직을 통해 다른 지방의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있었다.

“3월 19일에 진주 기생독립단이 만세를 불렀다우. 1만여 군중이 남강에서 촉석루까지 행진했다지요.”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요.”

1920년대 통영예기조합 단체 사진

통영 예기조합(藝妓組合) 소속의 정막래(예명 홍도, 당시 21세), 이소선(예명 국희, 당시 20세)을 비롯한 기생들은 금비녀·금반지 등을 팔아 광목 4필 반을 구입했다. 이것으로 태극기와 소복을 만들면서 기생들은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그 사이 여러 지방에서 기생들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들 전부가 투옥돼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받고 있다는 소식도 바람결에 들려왔다. 만세운동은 그 자체가 투옥과 고문을 향해 전진하는 것이었다.

“3월 29일에는 수원 예기조합 30여 명이 수원 자혜의원 앞에서 만세를 불러 모두 잡혀갔대.”

3월 31일 안성조합 기생들의 만세운동, 4월 1일 황해 해주 기생의 만세운동 등, 만세를 불러 일제의 세력이 전복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삼천리 민초들은 만세를 외치고 붙잡히고 만세를 외치고 붙잡혔다.

드디어 4월 2일, 통영의 기생들이 일어나기로 약속한 장날이 되었다. 30여 명의 기생들은 모두 준비해 둔 소복으로 갈아입었다. 고종 황제의 의문스런 죽음에 대한 애도이자 나라 잃은 슬픔의 표시로 입은 소복이었다.

이미 통영에서는 3월 13일의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장날마다 크고작은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장터 바로 옆에 경찰서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통영의 군민들은 총칼을 두려워하지 않고 만세를 부르다가 검거되곤 했다.

매일신보에 난 ‘통영 소요 기생 기사’

이날 지금의 중앙시장인 부도정시장은 3천 명의 장꾼들이 운집해 웅성거리며 심상치 않은 분위기 속에 술렁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오후 3시 30분경 통영 장터는 강윤조(30세)와 고채주(59세), 박상건(16세), 김영중(32세) 등의 주도로 만세소리로 뒤덮였다. 일본 경찰은 물대포를 쏘며 군중을 흩는 한편 무력으로 주동자를 체포했다.

한편 항남동 권번에서 출발한 30여 명의 기생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시가지를 행진하면서 목이 터져라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열대여섯 살부터 스물 초반 여성들의 외침은 통영 만세운동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 당시 천시받던 여성들, 더구나 기생들이 만세를 외치자 용기를 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 기생도 앞장서는데 당신들은 숨어 있겠소?’

회의적이거나 두려워하던 사람들 앞에서 기생들은 그들이 일어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묻고 있었다. 이날 숱한 사람들이 일제의 물대포와 총칼에 희생됐다.

정막래와 이소선에게 징역 6개월을 선고한 판결문

경상대 사학과 김상환 명예교수는 “통영지방의 만세운동은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1919년 5월 8일까지 보안법 위반자 52명, 기타 20명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보안법 위반자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말한다. 일제 관헌자료인 <조선소요사건 사상표>에 통영과 관련된 사상자가 표지돼 있지 않아 만세운동의 사상자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결코 적지 않은 사람이 희생되었을 것이라고 예상된다.

이날 강윤조, 고채주, 박상건 등과 함께 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된 사람은 정막래와 이소선이었다.

스물한 살이었던 정막래는 법정에서 판사에게 이렇게 질문을 했다.

“나는 여성으로서 본부(本夫)와 간부(姦夫)가 있는데 어느 남편을 받들어 섬겨야 여자의 도리에 합당하겠습니까?”

“물론 본부를 섬겨야지.”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여자가 본부를 찾아 섬기려는 것이오.”

이 말에 판사는 답변을 못하고 곧 퇴정하고 말았다. 정막래와 이소선은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그후 정막래의 소식은 전하지 않는데, 이소선은 평생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며 홀로 살다 죽었다 한다.

지난 2008년, 정부는 재판 기록을 근거로 두 사람에게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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