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마을 노인회장 김부린

멋쟁이 김부린 노인회장님

“저기 저 고개 위게(위에) 방두수라는 날건달이 살았는기라. 그 날건달은 기생집과 투전판을 제집 드나들 듯하매(하면서), 가정은 통 돌보지 않았제. 그란데 읍내 주막집에 낯짝이 반반한 과부가 들왔는기라. 그 과부는 원캉 어느 대감댁 소실이었는데….”

통영시 산양읍 가는개(세포마을) 위 능선인 ‘가는 이 고개’에 얽힌 이야기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 전설은 1997년 KBS TV 전설의 고향에 방영됐다.

이뿐 아니라 세포마을에는 나이 일흔에 한양 천릿길을 찾아가 임금님 앞에서 꽹과리를 치며 통영군민의 전복 수탈을 고변한 월성 정씨에 대한 이야기도 전한다. 이 이야기는 세포마을 입구 버스정류장 옆에 서 있는 비석 ‘유인월성정씨 영세불망비’에 새겨져 있다.

이 외에도 세포마을에는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한다. 세포마을 사람들은 오랫동안 세포마을의 고개며 바위, 비석을 보며 마을 이야기를 전해 왔다.

그러나 산업화로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마을의 이야기는 기억 속에 묻혔다. 화톳불을 돋우며 옛날이야기를 해주는 할아버지도, 옹기종기 모여앉아 이야기를 들을 아이들도 없어진 것이다.

세포마을에서 마을 이야기를 되살려낸 사람이 김부린(81) 노인회장이다. 김부린 회장은 통영의 극단 벅수골이 로컬스토리를 채록하던 2012년, 월성 정씨 할머니 이야기를 펼쳐내 ‘쟁이마을 할미요’라는 연극을 만드는 밑거름을 제공했다. 당시 벅수골은 통영 곳곳에 숨어 있는 이야기를 캐고 있었다. 벅수골 장영석 작가는 ‘쟁이마을 할미요’ 이후에도 세포마을의 설화를 소재로‘나붓등(2013)’, ‘치마꽃(2014)’을 썼다.

이 연극들이 통영시민문화회관에서 초연될 때 세포마을 주민들은 대거 연극배우로 참여, 열연하기도 했다. ‘색깔과 이야기가 있는 가는개 공동체마을’이라는 프로젝트로 연극을 향유한 즐거운 3년이었다.

연극 '치마꽃'. 3편의 연극에는 모두 세포마을 주민들이 출연했다.

이를 계기로 40년 동안 그쳤던 농악놀이가 살아나고, 축소해 지내던 당산제와 다른 마을활동들이 살아났다.

2017년부터 3년 동안은 경남문화예술진흥원의 문화우물 사업의 지원을 받아 세포마을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마을 어른들이 직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예쁜 책이다.

책 편집을 주도했던 세포마을 위관옥(50) 사무장은 “이 모든 이야기를 만드는 데 김부린 회장님의 역할이 가장 컸다.”면서 그를 마을의 ‘이야기 전수자’라고 소개했다.

김부린 회장은 1970년대 통영군의 초대 새마을지도자를 지낸 신금주 어른에게서 마을 이야기를 들었다.

“그 어른이 내보다 30년 위겝니다. 한학을 하싰고, 애향심이 대단하싰지요. 면사무소에 계심서 일정 때 처음 동네 이름을 왜 이렇게 지었는고를 알고 계싰지요. 마을에 내뿐이 남은 사람이 없었으니까….”

1970~80년대는 도시화가 거대한 사회적 물결이었다. 세포마을에서도 선후배, 친구들이 모두 도시로 떠났다. 통영지역을 기반으로 건설업을 했던 김부린 회장만이 마을의 젊은이로 남았다. 30대였던 김부린 회장은 막걸리며 담배를 사들고 자주 신금주 어르신을 찾아갔다.

가늘고 긴 포구를 끼고 있어 우리말로는 '가는개마을', 한자로는 '세포'라 한다.

김부린 회장은 신금주 어르신의 뒤를 이어 1976년부터 2대 새마을지도자가 됐다. 세포마을뿐 아니라 통영군 178개 마을을 아우르는 새마을지도자였다.

“그때는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라, 새마을지도자가 참 할 일이 많았지요. 그래도 나는 내 이익 위해서 살지 않았어요. 오죽하면 6년 8개월 지도자를 끝내자, 새마을 담당 공무원이 ‘이제는 세포마을에 길을 좀 냅시다”하고 길을 내 줬을까. 그게 우리 마을 첫 길이라.”

시멘트만 받아 마을사람들과 같이 도로를 포장해야 했지만, 건설업을 하고 있던 그에게 도로포장은 일도 아니었다. 그 길이 나고 마을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1981년에는 통영군 최초로 콘크리트 마을회관을 지었다. 종잣돈은 마을 앞 바다가 그린벨트로 묶이게 되면서 문을 닫게 된 굴 박신공장을 새마을 작업장으로 바꾸면서 받게 된 마을 지원금 1000만원이었다. 여기에 1500만원의 사비를 보태, 당시 통영군에서는 제일가는 마을회관을 지었다. 이렇게 열심히 뛰다보니 대통령 표창 두 번, 국무총리 표창도 한 번 받게 됐다.

“대통령 표창은 상금을 300만원씩 줬는데, 그것도 다 마을일에 들어갔지요. 친구가 이장을 하고 있어서 마을일을 내 일처럼 본 거지요.”

하지만 쉰넷, 젊은 나이에 친구가 죽고 김부린 회장도 건설회사를 설립하면서 조금씩 마을 일에서 멀어졌다. 마을은 구심점을 잃고 함께하던 여러 전통들을 잃어버렸다.

신성안 이장(왼쪽)과 김부린 노인회장은 세포마을의 구심점이다.

신금주 어르신의 5촌조카인 신성안 이장이 16년 전부터 마을일을 맡으면서 살기좋은 마을을 만들어보려고 애쓰던 터에, 세포마을은 2012년 통영시 ‘농어촌체험휴양마을’로 지정됐다. 그리고 김부린 노인회장의 이야기 전수로, 벅수골을 만나 이야기 마을로 거듭났다.

그로부터 10년, 김부린 회장은 “이장이 열심히 한께 도와줘야지.” 하며 마을일에 앞장선다. 농어촌체험마을이어서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아이들이 찾아오면 마을 해설을 하는 강사가 되어 전통에 대해 강의를 하기도 하고, 지신밟기 때는 직접 징을 치며 농악의 중심을 잡는다.

“요 위 세포큰길은 옛날 군사도로로 썼던 길이라. 삿갓장이, 옹이장이, 양태장이 같은 장이들이 살았지. 고구마를 주식으로 삼고 살던 우리 어머니 시절 이야기도 있고, 아직도 우리 마을엔 더 캐낼 이야기가 많습니다.”

정체성이 사라진 시대에, 김부린 회장은 어릴 적 엄마품 같은 가는개마을의 이야기를 지켜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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