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무지개와 함께 빚는 천년의 빛
일곱 무지개와 함께 빚는 천년의 빛
  • 김선정 기자
  • 승인 2020.02.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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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손공방 이유정 작가
엄마손공방 이유정 작가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 걸까? 이렇게 닳아지다가 나라는 존재가 없어지는 건 아닐까?’

마흔 살을 넘길 무렵, 이유정 씨는 한계에 부딪치고 있었다. 중3부터 세 살까지 졸졸이 여섯 명의 아이들이 집에 있었다. 군인인 남편을 따라 통영에 자리를 잡은 지 두 해가 지나고 있었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통영은 너무나 낯선 타향이었다.

당시 이유정 씨는 파리바게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에너지가 있는 스타일이라 일을 할 때는 집중해서 하는데, 그 무렵에는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문득문득 ‘아이들만 보고 살 수는 없잖아. 나는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럴 때면 갑작스럽게 조바심이 났다. 엄마의 정신이 건강해야 아이들도 돌볼 수 있는데, 마음이 무너지는 것이 스스로 감지됐다.

나전칠기를 가르치고 있는 이유정 씨

가족을 위해 시작한 아르바이트는, 시간은 시간대로 쓰면서 오히려 아이들을 제대로 못 돌보게 했다. 결국 유정 씨는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아이들에게 전념했다. 그러면서 틈틈이 냅킨아트 같은 공예를 배웠다. 원래 그는 대학에서 ‘응용미술’을 전공했었다.

“그무렵 6학년이던 셋째가 옻칠미술관에서 나전칠기를 배웠어요. 그때 처음 옻칠공예를 알게 됐는데, 너무 배우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옻액이나 나전은 재료가 워낙 고가여서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러다 냅킨아트 선생님을 통해 통영시에서 운영하는 ‘나전칠기교실’을 알게 됐다.

유정 씨는 2014년 통영나전칠기교실 4기생으로 입학했다.

“너무 재미있었어요. 하루 종일 해도 좋은 거예요. 거의 미쳐 살았던 것 같아요.”

사실 나전칠기를 만드는 과정은 도를 닦는 듯한 인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흔히 체험할 때 하는 나전 붙이는 과정은 50가지도 넘는 공정의 극히 작은 부분이다. 나전을 붙이기 전에 베를 바르고 옻칠을 하고 건조하고 사포로 문지르고 다시 옻칠을 하는 지난한 과정을 반복해야 나전을 붙일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된다.

그런데 유정 씨는 그런 과정 하나하나가 너무 재미있었단다. 옻이 올라서 퉁퉁 부어도 괴로운 줄 몰랐단다. 대학교 시절, 학교에서 밤새 실크스크린 따던 그 열정을 되찾은 것 같은 두근거림도 있었단다.

그런 열정의 결과로 나전칠기를 배운 첫 해에 유정 씨는 경남관광기념품 공모전에서 장려상과 특선을 수상했다.

2학기에 들어서자 4기생들은 문화재칠공자격증을 준비했다. 문화재를 수리할 수 있는 자격증이었다. 그런데 그 무렵, 아기가 또 왔다. 일곱째였다.

“병원에 가면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 병원을 포기했죠.”

여섯째 아기가 생겼을 때, 병원에서는 자궁 상태가 너무 안좋아, 누워 있을 거 아니면 떼어야 한다고 겁을 줬다. 이미 5명의 아이들이 있어서 누워 있을 수 없었던 유정 씨는 아기 대신 병원을 포기했다. "나에게 온 보석 같은 아기를 뗀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아기를 낳을 때가 돼서야 병원에 갔지요."

일곱째의 임신에 겁이 안 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유정 씨는 뱃속의 아기에게 말했다.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자. 내가 맛있는 것 많이 먹고 열심히 살 테니, 너도 좋은 양분 잘 받고 건강히 살아라.”

막내딸과 함께 나전칠기교실 수료식을 한 이유정 씨(오른쪽)

이듬해인 나전칠기교실 2학년 5월에 유정 씨는 일곱째를 낳았다. 산후조리를 한다고 누워 있는 동안에도 유정 씨는 머릿속으로 옻칠을 했다. 그리고 삼칠일이 지나자마자, 나전칠기교실에 갔다. 직접 작업을 못하더라도 그 자리에 앉아 있고 싶었다. 놀랍게도 막내딸은 보채다가도 수업을 시작하면 잠을 잤다. 그해 유정 씨는 무사히 문화재칠공 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다시 한번 통영 관광기념품 공모전에 작품을 출품해 장려상을 수상했다.

유정 씨는 아기와 함께 수업을 들으며 3년 과정을 모두 마쳤다.

"졸업전시회 때 좀더 완성도 있는 작품을 내놓지 못해 속상했지만, 속으로 주문을 외듯 ‘완성도는 생각하지 말자. 참여하는 데 의의를 갖자.’는 말을 되뇌었어요."

'모태나전'이라는 별명이 붙은 막내딸

졸업하던 2016년에는 경남관광기념품 공모전에서 은상을 수상했다. 더 큰 상을 받은 동기들이 있었지만, 욕심은 접어야 했다. 대신 세상에서 가장 예쁜 아기를 받았으니까.

뱃속에서부터 나전칠기를 배운 막내는 세 살 때 어른들보다 나은 끊음질 솜씨를 보여줬다. 식구들은 막내딸에게 '모태나전'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이 막내딸은 지금 여섯 살이 됐다. 제일 큰언니가 24살, 그 아래로 22살, 20살, 16살, 14살 언니들이 있고, 바로 위 11살이 오빠다.

그 사이 유정 씨는 가족들의 지원을 받으며 작가로서의 새 인생을 시작했다. 고성 도원미술관 전시를 비롯한 나전칠기 단체전에 참여하면서 개성있는 작품으로 가능성을 보여준 이유정 작가는 지금 고성에서 '엄마손공방'을 차려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이유정 작가의 공방이 고성에 있는 건 남편의 임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유정 작가는 고성의 학교와 문화센터에서 나전칠기와 목공수업들을 하고 있다. 고성 '꿈꾸는 마을학교'의 마을학교 선생님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통영에서도 장애인복지관과 치매센터에서 수업을 하고 있다.

2018년에 경남 예술문화진흥원의 문화리더과정 4기를 수료하고 2019년에 전래놀이지도사 자격증도 갖춘 이유정 작가의 수업은 재미있기로 이름났다.

"통영 서피랑에 체험을 할 만한 공간을 만들고 있어요. 통영에 와서 나전칠기를 배운 게 제 인생을 바꿨죠. 앞으로는 더 작품 활동에 매진해 개인전도 갖고 싶어요."

이런 엄마의 꿈을 아는 아이들은, 공방을 엄마의 공간으로 이해하고 터치하지 않는다. 공방의 이름도 여섯째인 아들이 지어줬다.

“만약 아기 때문에 과정을 포기했더라면 우울증이 왔을지도 몰라요. 내가 행복하게 사니까 오히려 아이들이 자기의 자리에서 잘 지내는 것 같아요.”

일곱을 모두 모유를 먹여 키웠으면서도 이유정 작가는 ‘육아’라는 말이 부끄럽다고 말한다. 저희들끼리 서로서로 도와가며 즐겁게 자라주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엄마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고 있으니 말이다.

무지개 빛 일곱 아이들의 응원을 받으며 이유정 작가는 오늘도 공방에서 '천년의 빛'을 빚어낸다.

통영 서피랑에 전시, 체험공간을 만들고 있다.
나전칠기에 관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유정 씨의 나전칠기와 목공 작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