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매니저 이힘찬 대표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10여 년 전부터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은 벼랑 끝에 서서, ‘사서 한다’는 고생의 길로 내몰렸다. 스스로 ‘사서’ 하는 게 아니라 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냉혹한 현실과 마주했다.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한국의 20대를 지칭하는 ‘88만원세대’라는 말이 처음 나온 것이 2007년이다. 비정규직 평균 급여 119만원에 20대 평균급여에 해당하는 74%를 곱한 금액이 88만원인 데서 기인한 말이다. 2011년에는 ‘연애·결혼·출산’의 세 가지를 포기하거나 미루는 청년 세대를 이르는 ‘삼포세대’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이에 더해 ‘취업과 내 집 마련 포기’까지 합쳐 ‘오포세대’, ‘인간관계나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 ‘칠포세대’ 등의 신조어가 계속 등장하면서, 이 모든 것을 포괄해 ‘N포세대’라는 말이 나왔다.

지금도 끝난 것은 아니지만, 10여 년 전 우리 젊은이들은 우리나라를 ‘헬조선’이라는 자조적인 말로 부르며 이 땅을 등졌다.

통영 중앙로에서 안경점을 하는 이힘찬(37) 안경사도 그 무렵 한국을 떠났었다. 당시 그는 청년문제의 한복판에 서 있던 20대 말이었다.

“너무 힘들어서 도망치듯이 떠난 길이었습니다. 전 재산 40만원을 들고 호주로 갔지요.”

이힘찬 안경사는 통영의 대표적인 달동네였던 동피랑에서 태어났다. 칠삭둥이로 태어난 그에게 어려움에도 굽히지 말고 힘차게 살아가라고 부모님은 ‘힘찬’이라는 한글 이름을 지어주셨다.

충무초, 동중, 통고를 나와서, 그는 비교적 취업이 잘된다는 안경과에 진학했다. 학창시절부터 이미 취업의 어려움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기에, 남이 빼앗아갈 수 없는 기술을 갖기 위한 선택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서울 노원구에서 안경사로 일했다. 그러나 혼자 숙식을 해결하며 일해야 하는 가난한 출발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았다.

“남의 밑에서 일하다가는 돌파구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서로가 힘든 때라, 전화만 오면 돈 있느냐는 전화…. 사는 게 힘들어 한국에 있기 싫었습니다.”

그러나 호주에서 맞닥뜨린 삶도 그리 녹록하지는 않았다. 노동이 정당한 대가를 받는다고 알려진 나라 호주에서, 그는 하루 11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았다. 그가 한 일은 주로 설거지, 청소 등 몸을 쓰는 노동이었다.

더 많은 수입을 얻기 위해서 그는 1~2시간짜리 청소 일을 했다.

“오후 4시부터 아침 7시까지, 사무실이 빈 다음에 이 사무실, 저 사무실을 옮겨가며 밤새 일했습니다. 밥도 굶어가며 청소를 하다보면 어느새 날이 부옇게 밝아오곤 했습니다. 그때 몸무게가 52kg이었어요.”

3년째 되었을 때, 그는 ‘평생 여기서 청소만 하다 끝나겠다.’ 하는 두려운 자각을 했다. 이십대의 그 아름다운 시간을 코앞의 돈만 보며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때는 큰돈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나이 때 그 나라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보는 게 더 나았을걸, 지금 생각하면 후회되기도 하지요.”

그래도 그 시간이 마냥 헛되이 지나간 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라면 뭘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시작해야겠다는 용기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남들에게 없는 ‘안경사’라는 자격증이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 늘 사람이 많았다. 호주에서도 친구들을 쉽게 사귀었다. 길을 지나다 보면 즐겁게 인사할 사람이 많아, 친구들은 그에게 ‘선거하러 왔니?’ 하는 농담을 할 정도였다. 이 자격증과 친화력은 분명 새 출발의 좋은 밑천이 될 것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의 안경점에서 일하면서, 그는 창업을 준비했다. 여전히 돈은 없었지만, 여러 가지 길을 통해 대출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물색했다.

1년 이상의 경력이 있어야 가능한 창업자 대출, 청년 대출 등의 자격을 갖춰 가면서 준비한 끝에, 그는 고향에 안경점을 개업했다. 서른네 살, 3년 전 일이다.

빚으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두려움보다는 기대가 컸다. 고생한 사람의 자신감과 절박함이 ‘일단 한번 해 보자’ 하는 용기를 만들어 냈고, 스스로 돕는 자를 하늘은 도왔다. 이곳저곳에서 도와주고 알려주는 일이 생겼고, 좋은 사람을 만나 길이 열리기도 했다. 도저히 안 된다던 대출이 이루어지는 일도 있었다. 통영 경기가 어려운 것도, 월세가 낮아지는 장점으로 작용했다.

중학교 때 친구인 박효성 대표도 인생에서 모아놓았던 돈을 다 투자하며, 동업을 하기로 했다. 안경사인 이힘찬 대표는 오프라인의 안경점을, 박효성 대표는 온라인의 도매점과 쇼핑몰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거짓말 안 하고 잘 해드리는 것밖에 없지요. 도매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좀더 저렴한 가격에 서비스할 수 있다는 게 장점입니다.”

고향에서 겪는 어려움은 이국땅에서 눈물 젖은 빵을 먹던 어려움에 대면 언제나 별것 아니었다.

여전히 통영 경기는 어렵고, 여자친구를 만날 시간도 내기 어려워 청춘사업에 빨간불이 켜지지만, 이젠 제법 좋은 소문이 난 내 가게가 있으니 이힘찬 대표는 자신의 이름처럼 힘차게 오늘을 달린다.

친구인 박효성 대표(왼쪽)는 온라인 도매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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