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중국어학원 김미화 원장

100년 만에 돌아온 한국땅

나는 대한민국사람이다.

비록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뿌리만은 한국인이 아니었던가? 나의 선조님들이 이 땅에서 살았고 지금도 다른 한 줄기 조상들은 이 땅에 살고 있지 않는가?

나는 대한민국 애국가가 울려 나올 때면 가슴이 찡해오고 눈물이 난다. 가슴속에서 물결이 요동친다.

할머니는 대한민국 땅을 꿈속에서라도 한번 가보고 싶어 하셨다. 나라를 잃은 당시 환경이 할머니를 중국으로 보냈지만, 할머니는 항상 고향생각을 했다. 그리고 고향생각이 날 때마다 우리 손자 손녀들에게 고향 이야기를 해주셨다.

나는 때때로 운명이 나를 이 땅으로 불러주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고향을 그리워하지만 고향에 갈 수 없었던 할머니의 그 간절한 마음이 나를 이 땅에 보낸 것은 아닐까?

죽림에서 상하이중국어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김미화 원장(46)은 조선족이다. 중국 흑룡강성에서 태어나 28년 동안 중국 국적을 가지고 살았고, 통영 남자와 결혼해 한국에서 19년째 살고 있다. 조선족은 우리나라를 가슴에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고국으로 품고 있건만, 어떤 한국인들은 마치 타국인인 듯 그들을 대하기도 한다.

"할머니는 열두 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따라 만주로 가셨대요. 그리고 그해, 만주에서 먼저 자리잡고 있던 다른 조선인 집안에 시집을 가셨대요."

열두살에 떠난 고향을 평생 그리워했던 할머니

할머니의 고향은 전라도 순천, 할아버지의 고향은 이북이라 했다. 남과 북이 나뉘지 않았던 시절, 만주에서 만난 두 사람은 그저 고향이 다른 조선인이었고, 남의 나라 땅에서 서로를 보듬고 위로해야 했던 살붙이였다.

"우리들 어린 시절 할머니는 최고의 이야기꾼이었어요. 할머니는 항상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를 피우던 시절에’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셨어요.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콩쥐팥쥐, 효녀 심청 같은 이야기들을 모두 할머니에게 들었지요."

열네 살에 연길로 이사를 와서 김미화 원장은 처음으로 한글로 된 동화책을 보았다.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낸 흑룡강 지방은 조선족이 적어 한글로 된 책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할머니가 해 주신 이야기가 우리나라 전래동화였다는 걸 그때 알았지요. 연길에서는 북한 책도 만날 수 있었는데, 만화로 된 임꺽정 이야기를 읽었어요."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역사이기도 했다. 독립 운동가들을 도왔다는 죄로 일본군에게 모진 고문을 당한 할아버지는 20년 동안 병을 앓아야 했다. 자식 열둘을 낳아 줄줄이 여덟을 하늘나라로 보내야 했던 절절한 사연은 이방인의 서러운 삶을 대변하기도 한다. 특히 스물셋에 세상을 떠난 큰아들은 중국의 혁명열사로 할머니에게 유공자 혜택을 주기도 했지만, 그 어떤 혜택이 자식 잃은 슬픔을 대신할 수 있을까?

아버지와 형제들

할머니가 어린 나이에 자녀를 낳고 키우는 사이 우리나라는 남과 북이 나뉘고 대한민국이 되었지만, 중국에 남은 그들은 멈춰진 시간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외갓집도 북한 쪽에 뿌리를 두고 있는 조선족이어서, 외가쪽 친척 중에는 북한과 거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학에서 회계학을 전공하고 직장을 다니던 중에 김미화 원장은 시아주버님의 소개로 남편을 만났다. 통영이라는 곳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지만, 할머니가 그토록 그리워하셨던 나라였기에 한국행 결심이 어렵지 않았다.

"처음 결혼하고 얼마 안 돼 친정아빠, 삼촌과 함께 할머니의 고향이라는 곳을 찾아가 봤어요. 하지만 할머니도 어릴 때 떠났기 때문에 알 만한 분들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벌교와 순천 사이 바닷가 근처 작은 마을이라고 했다. 나지막한 산언덕이 있는 마을에서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었다는 말씀도 하셨다. 그러나 100년 세월은 열두 살 어린 소녀가 물을 긷던 우물도 덮어 버렸고, 함께 재잘거리던 순희, 영희 같은 동무들도 데려가 버렸다.

유학을 준비중인 제자들

할머니의 추억은 순천만의 억새숲에 묻어버리고, 김미화 원장은 통영에서 행복한 가정을 꾸려 가고 있다. ‘딸바보’로 불리는 남편 항상 고마운 사람이다.

"중국 연변대학에서 같이 공부했던 친구가 한국에서 중국어를 가르친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중국어를 가르치게 되었어요."

최고의 교사가 되려면 중국어를 객관적으로 봐야 했다. 이미 중국에서 연변재정무역대학을 졸업했지만, 김원장은 한국방송통신대학 중어중문과에서 중국어를 객관적으로 공부했다. 대학에서는 한국문화와 한국역사에 대해서도 배워, 한국을 더 알아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더 좋은 강사가 되기 위해 1년 동안 밤차를 타고 서울을 오가며 교수법을 공부했다.

"금요일 밤차를 타고 서울에 가서, 토요일 9시부터 5시까지 교수법에 대한 강의를 듣고 돌아왔어요. 중국어를 잘 안다고 자기만의 생각으로 가르치면 안 되잖아요. 전문가들에게 재미있게 수업하는 방법을 배웠지요."

어린아이들과 수업을 하려면 주입식 수업보다는 다양한 도구를 활용한 중국어 수업 비법이 필요했다. 놀이식 수업 방식을 도입하여 중국어의 재미와 흥미를 이끌어 냈다. 그동안 배우고 익힌 요령으로 유치부부터 대학생, 성인에 이르기까지 학생의 눈높이에 맞추어 수업을 하고 있다.

방학이 되자 김미화 원장은 중국의 유학준비생과 대학예비 진학생들 수업 때문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학원을 졸업하고 대학으로 유학을 갔던 친구들도 한명 한명 찾아오기 시작한다. 제자들과 함께 중국생활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우며 즐거워하는 김미화 원장은 어쩌면 중국과 한국의 다리 역할을 운명으로 태어났는지 모른다.

 

 

 

제자들과의 시간은 언제나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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