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이 세운 각암비, 200년 뒤 주민이 다시 새겨
국법보다 백성의 안위를 먼저 생각한 김영 통제사 각암비

김영 통제사 각암비가 50년 만에 복원됐다.

법보다 백성을 먼저 생각한 참 목민관 김영 통제사의 각암비가 50년 만에 복원됐다. 200년 전 주민들이 바위에 판 글씨와는 사뭇 다른 모양이지만, 2019년에 세우는 기념비이니 현대적인 모양이 됐다.

새 기념비에는 200년 전 주민들이 바위에 새겼던 한자 원문과 1934년 ‘통영군지’에 실린 ‘김영 통제사 각암비 기사’가 새겨져 있다.

그 옆으로는 비문을 번역한 해설비가 따로 섰다. 1996년 통영문화원(김상조 역)에서 발행한 ‘국역 향토지’를 참조해, 쉽게 풀어 쓴 국문과 원문에 음을 달아놓았다.

한자 원문을 실은 각암비와 해설비

원래의 각암비는 정량동 주민들이 조선 순조 때 제166대 통제사 김영을 위하여 1830년에 세웠던 비다. 1829년 정량동 덤바우골 인근에 큰 화재가 났을 때 김영 통제사는 덤바우에 올라 화재 진압을 지휘했다. 또 화재로 집을 잃은 백성들에게 소나무 벌채를 허락하여 집을 짓게 했다. 그러나 이는 소나무를 베지 못하게 한 ‘금송령’을 어긴 일이다. 김영 통제사는 국법을 어긴 죄로 파직당했다. 이를 애통히 여긴 정량동 주민들이 김영 통제사에게 감사하기 위해 세운 것이 각암비다.

그로부터 104년 뒤인 1934년, 일제시대 ‘통영군지’에 ‘각암비’에 대한 해설이 실렸다. 인가 수백호가 불에 탄 일, 남쪽과 북쪽 산의 소나무 벌채를 허락한 일, 직지사의 고변으로 통제사가 파직당한 일, 백성이 화재를 진압하던 바위에 김영 통제사의 은덕을 새긴 자세한 사정은 통영군지를 통해 전해졌다.

감사 인사를 전하는 해풍김씨 대종회 김진우 회장

오히려 각암비를 무참하게 없앤 것은 1970년대 우리나라였다. ‘잘살아보세’ 한 마디에 문화재와 전통이 파괴되던 때, 김영 통제사 각암비는 동호동 도로공사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은혜를 입은 4개 동 동민이 세웠던 각암비이니, 지금의 주민이 복원하는 게 맞다.”고 뜻을 모은 건 류성한 정량동장과 주민자치위원회를 비롯한 동민들이었다. 정량동 주민들은 지난 8월 김영 각암비 복원 추진위원회(위원장 백현백)를 구성하고, 주민들의 자발적 모금을 통해 사업비를 마련하여 약 50여 년 만에 다시 각암비를 세웠다.

지난 5일에 있었던 제막식에는 김영 통제사 후손인 해풍김씨대종회(대종회장 김진우) 25명과 복원사업 관계자 및 정량동 주민 등 약 100여명이 참석했다.

지역구 의원인 김용안 산업건설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나는 파직될 것을 알면서 국법을 어기는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준법과 편법, 민생과 불법 사이에서 공익과 사익이 충돌할 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묵직한 화두를 던지며, 법보다 민생의 삶을 먼저 생각한 김영 통제사의 참 가치를 되새겼다.

비석전문가 이충실 씨가 비석 원문을 해석하고 있다. 
해풍김씨 대종회에서 백현백 추진위원장에게 감사패를 증정했다. 

 

김영 통제사, 도적 떼가 벌벌 떨던 유명한 포도대장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화산리에 있는 김영 통제사의 묘표
김영 통제사(1772~1850)는 정조11년인 1787년 16세의 나이로 무반의 청요직인 선전관 후보가 됐다. 1794년 무과에 급제하고 군영대장만 5번,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삼도수군통제사, 좌·우 포도대장, 한성부 판윤 등 화려한 관직을 두루 거치고 1845년 형조판서가 됐다.
포도대장만 24번을 지냈다고 전해지는데, 그가 포도대장이 되면 도적 떼들이 없어졌다고 할 정도로 도적을 잘 잡았다. 그의 공적은 동요로 불릴 정도여서, 김헌규가 편찬한 ‘해충김씨역직세보’에 그 동요가 남아 있다.
"세월아 네월아 가지를 말어라./이현장신이 다 늙어 가노라/좌우포장 스물네 번에/조선천지가 잔잔하고나.” 하는 동요에 나오는 ‘이현장신’이 바로 이현에 살던 김영 통제사다.
화성 화산리에 있는 김영의 묘는 ‘장군총’이라고 불린다.

 

비문을 설명하고 있는 박우권 자문위원

 

통제사 4대를 역임한 해풍김씨
20대를 이어온 무관 집안, 3명의 통제사 배출
강석주 통영시장과 해풍김씨 장손인 김주용 교수

“이제 성인이 됐으니 통영에 내려갔다 오너라.”

해풍김씨 장손(27세손) 김주용 교수(원광대학교 조교수)는 대학에 입학하게 됐을 때 집안 어른들이 통제영을 찾아 조상님들의 흔적을 찾아볼 것을 권했다고 한다. 20대 동안 거르지 않고 대대로 무관을 지낸 해풍김씨 집안은 3분의 삼도수군통제사를 낸 무인 가문이다. 통제사를 2번 역임한 김건 통제사(1789~1869)와 덤바우골 각암비의 주인공인 김영 통제사, 그의 장남인 김한철 통제사다. 김영 통제사는 나중에 형조판서까지 오르지만, 김한철 통제사는 1856년 통제영에서 순직하셨다.
세병관 현판 속에서 집안 어른들을 찾으며 성인을 맞게 하는 해풍김씨 집안의 가르침은 2019년에 김영 통제사를 기리는 통영 주민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저희 집안의 마지막 무관은 경복궁에서 시종언 시어로서 고종황제를 측근에서 보좌했던 증조부님이십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청와대 경호실에서 근무했다는 말이다. 증조부 김연방 선생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스물네 살의 나이에 낙향을 했으며, 고향인 화성에서 1919년 삼일운동에 참가했다. 이후 주동자 색출과정에서 집안에 난입한 일제의 총탄에 맞아 순국했다.
김주용 교수는 각암비 제막식에 참석해 “다시한번 조상들의 행적을 기리며 가문의 전통을 이어가야 할 책임을 느낀다.”고 말했다.
김미옥 기획총무위원장
김용안 산업건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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