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오광대 예능보유자 김홍종

“아이고, 여보소, 이내 한 말 들어보소. 그 지체 쓸쓸한 울아부지, 울옴마, 인간의 죄를 얼마나 지었건대 몹쓸 병이 자손에게 미쳐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을까.”

굿거리장단에 맞춘 문둥이의 하소연이 애걸지다. 통영오광대보존회 김홍종(71) 보유자의 문둥춤에서는 손끝 하나, 몸짓 하나에 천형의 괴로움이 묻어난다.

“통영오광대는 지방자치놀이라고 할 수 있는 ‘사또놀음’의 한 부분입니다. 사또가 삼현육각의 매구패를 앞세우고 행진하면서 고을 한 바퀴를 돌고, 용화사 띠밭등에서 한 바탕 매구를 치며 놀고 나면, 오광대 탈놀음이 뒤따랐습니다. 관에서 풀지못한 것을 사또놀음으로 푼 것이지요.”

통영에서 사또는 삼도수군통제사다. 오광대는 사또를 핍박하고 문전박대하고 질타한다. 양반에게 눌려 살던 서민들은 오광대를 보면서 맺힌 한을 달랬다.

김홍종 선생이 통영오광대에 뛰어든 건 1975년이다. 당시 유영초등학교 교사였던 김홍종 선생은 합주부 학생들을 이끌고 남망산을 오르다가 ‘운명처럼’ 통영오광대의 북소리를 들었다. 천둥처럼 강렬하게 울리는 북소리, 해학 넘치는 연극과 박력 있는 춤, 슬픈 듯 재기넘치는 탈….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한민족의 DNA가 북소리를 듣고 깨어난 것일까. 김홍종 선생은 오광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문둥춤을 추고 있는 김홍종 예능보유자

동료들과 함께 오광대전수관을 다니기 시작한 그는, 매력적인 탈춤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해방 이후에 통영오광대를 중흥시킨 장재봉(1896~1966) 선생의 춤을 되살리고 싶은데, 통영오광대를 국가지정무형문화재로 만든 그분은 이미 타계하고 안 계셨다.

남아 있는 문헌으로 그분의 춤을 되살리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분의 제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사라져가는 통영의 전통문화도 채록하자니, 시간이 부족했다.

고민하던 그는 어느 날, 어머니와 아내에게 마음속 열망을 털어놓았다.

“우리 전통문화를 살려 보고 싶습니다.”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있는 가장이며, 외아들이면서 새신랑이었던 그로서는 참 무모한 열정이었다. 그러나 어머니 백양순 여사는 “그 피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우리 문화를 찾는 일도 중한 일이지.” 하며 허락했다. 아내 임숙영 씨 역시 “제가 뒷바라지를 할 테니 당신 하고 싶은 거 하세요.” 했다.

공무원인 아내에게 살림을 떠맡기고 사표를 낸 그는, 그때부터 문둥춤과 말뚝춤의 명수였다는 장재봉 선생님의 춤을 익히기 위해 그의 제자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장재봉 선생의 제자들은 김홍종 선생이 재현한 문둥춤을 보고, “장재봉 선생의 춤이 맞다!”며 무릎을 쳤다.

김홍종 선생은 2012년 예순다섯 나이에 국가가 인정하는 중요무형문화재 제6호 통영오광대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연주하기 시작한 트럼펫은 그의 분신 같다.

하지만 김홍종 선생을 ‘통영오광대 예능보유자’만으로 표현할 수는 없다. 그가 한평생 일궈온 예술과 교육의 여정을 100이라 하면 통영오광대는 10쯤 될까? 올해 그는 제5회 송천박명용통영예술인상 본상을 수상했다.

“42년 간 다양한 예술 활동으로 지역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해 왔고, 현재까지 노인대학 드림(꿈) 합창단 지휘자, 하모니카 합주단 지휘자, 통영시립도서관 해설자로서 다양한 예술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평이다.

경찰악대 악장을 하셨던 김홍종 선생의 아버지는 못 다루는 악기가 없었다. 어머니도 노래를 잘 부르셨다. 그 피가 김홍종 선생에게 이르러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 미술, 체육에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

“트럼펫을 불면 모든 관악기를 연주할 수 있고, 클라리넷을 불면 모든 리드악기를 연주할 수 있습니다. 바이올린 하나를 익히면 다른 현악기도 쉽게 다룰 수 있지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기지만, 어쨌든 김홍종 선생은 바순, 호른, 색소폰, 바이올린, 플루트 등 못 다루는 악기가 없다. 클래식, 재즈, 포크송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도 정통하다. 학교 교사를 하면서 합창단을 창단, 지휘를 하기 시작한 그는 1977년에는 충무시합창단을 지휘했다.

페루 마추피추에서

1980년대에는 통영전통문화를 발굴하기 위해 섬마을 곳곳을 찾아다녔다. 이미 어르신이 된 당시 노인들에게서 어린시절에 보았던 놀이와 노래를 채록, 악보화하거나 춤을 배웠다. 자칫 잃어버릴 뻔한 통영의 민속음악과 춤을 비디오로 촬영하거나 문서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한 섬에 적어도 열 번씩은 간 것 같아요. 열 번은 만나야 제대로 된 문화의 원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사진작가이며 영상제작자가 됐다. 1990년에는 관광객들에게 보여 줄 요량으로 ‘전통과 관광의 도시 충무’라는 1시간짜리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무형문화재를 발굴한다고 통영을 뒤지고 다니는 그를, 지인들은 ‘벅수’라고 불렀다. 돈도 안 되는 일을 비싼 장비를 들고다니며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때 발굴한 통영 전통연희인 통영사또놀음, 두레패놀이와 이무기 등은 아주 가치 있는 문화유산으로 꼽힌다. 증언자들이 세상을 등진 오늘에 와서는 다시 복원할 수 없는 것이 돼 버렸다.

“자식들에게는 미안하지요. 어느 날 아이가 자기는 ‘돈 버는 일을 하겠다.’고 하는데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도 그는 고향을 위해 일한 인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고향도 그에게 제30회 한국예총 예술문화상 대상, 통영예술인상 등으로 보답했다.

고희를 넘긴 지금, 그는 마지막 봉사를 생각한다. 가장 마음을 쏟고 있는 부분은 노인들과 함께하는 ‘드림합창단’과 들숨과 날숨을 모두 사용해 악기를 연주하는 두띠하모니카합주단.

“이제 그동안 맡고 있던 일들을 하나씩 정리하고 있습니다.”

남은 시간, 그는 후배 양성을 사명으로 알고 목숨처럼 사랑했던 통영 문화를 하나씩 보듬는다.

두띠하모니카합주단
윤이상 생일축하 공연
 드림합창단 지휘
쿠바의 유명한 아큐반 재즈팀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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