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로 시작하는 인생2막
봉사로 시작하는 인생2막
  • 김선정 기자
  • 승인 2019.09.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상대학교 명예교수 정한식
자원봉사 강연중인 정한식 교수

 

예순다섯, 숨가쁘게 달려온 인생길에 은퇴라는 종착역이 있었다. 때로는 아름다운 꽃길을, 때로는 험하고 가파른 길을 달려야 했던 치열한 직업의 열차가 도착하는 곳이다.

1980년대부터 대학에 몸담아온 정한식 명예교수는 1995년부터 경상대학교 해양과학대학에서 25년간 교수생활을 하고 지난 8월에 은퇴했다.

진공유리관 태양열 집열장치(2002)’, ‘적조예방을 위한 선박탑재형 해저퇴적물 제거 시스템(2010)’, ‘자가 진단을 위한 의료용 소변기(2010)’ 등을 비롯한 18개의 발명특허를 등록한 공학박사로, 40여 명의 박사를 키워 낸 교수로 열심히 살아온 세월이었다.

특별한 것은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한국냉열에너지학회를 창립한 공학자의 이면에 문학가의 면모가 공존하는 것이다. 2007년 계간 문학예술로 등단, 시인이 된 정한식 교수는 수향수필문학회, 통영문인협회 회원인 작가다. 201812월에는 남국문학상 수필부문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흔히 종착역으로 여겨지는 은퇴, 그러나 정 교수는 은퇴라는 역사(驛舍)가 멀리서 보일 때부터 인생2막을 준비했다.

은퇴 2년 전인 2017, 그 무렵 은퇴한 아내 차윤선 박사와 같이 사이버로 한국어교육을 전공, 한국어교사 2급 자격증을 준비한 것이다. 그리고 이달 초부터 한빛문학관 한국어교실에서 봉사를 시작했다. 막연히 나눔의 삶을 살겠다 하지 않고, 한국어교사라는 구체적인 활동을 정하고 미리 자격을 갖추며 은퇴 후를 준비한 것이다.

수많은 봉사 영역 중에서 한국어 교사를 선택한 건 평생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온 선생이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 차윤선 박사도 39년 교직생활에 있다가 충무중학교 교장으로 은퇴했으니, 가르치는 일이야말로 정한식 교수 부부에게 꼭 맞는 일이다.

그 가르치는 것이 한국어인 까닭은 그가 외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본 경험 때문이다. 그는 교환교수와 안식년으로 인도네시아, 일본, 태국 등에서 1년씩 살았었다. 인생을 살 만큼 살고, 지식적으로 배울 만큼 배운 다음에 겪게 된 이방살이였는데도, 언어와 문화의 장벽은 높았다.

낯선 나라에 사는 어려움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살러 온 결혼이민자들에 대해서 더 마음이 갑니다. 언어와 문화의 벽에 싸인 그분들을 돕고 싶습니다.”

그래서 정한식, 차윤선 부부는 수업시간마다 작은 선물을 준비하기도 하고, 후원자를 모시기도 하고, 집으로 학생들을 초대하기도 하며 한국어교실에 정성을 다한다. ‘감동이 있는 수업을 만들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말도 안 들리고 아는 사람도 없는 한국에서 사는 것이 녹록치 않습니다. 한국 사람들로 인한 상처도 많이 갖게 되지요. 우리의 섬김으로 감동과 사랑이 전해진다면 힘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내를 생각할 때 정한식 교수는 전폭적인 지지라는 말이 떠오른다고 한다. 자녀를 교육할 때나 외국 생활을 결정할 때, 인생2막을 봉사의 삶으로 설계할 때 아내는 100% 응원하고 지지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온 가족이 5시 반에 일어나 신문배달을 했습니다. 아침에 운동도 되고, 좋은 습관도 기르고, 자기들 용돈은 스스로 버는 효과까지 있었지요. IMF 때였는데, 아내가 반대하면 할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아내도 구역을 맡아 같이 신문을 돌렸던 시절, 아이들의 내적강화는 저절로 이루어졌다. 시키지 않은 새벽 공부까지 하게 되니, 좋은 성적은 덤으로 받았다.

그렇게 자란 큰아들과 둘째아들은 서울대를 나와 지금 법무법인 세종의 변호사가 되었다. 큰며느리는 현재 통영지원의 판사이고, 둘째며느리는 법무법인 동인의 변호사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막내아들은 미국 프리스턴대학교에서 이학박사를 받고 폴란드 바르샤바대학교에서 조교수로 있다.

든든한 가족들과 함께

 

이 든든한 아들들은 부모가 봉사하는 한국어교실 결혼이민자들의 고문변호사를 자처할 뿐 아니라 아버지의 후원자 역할도 하고 있다. 정교수가 만들어, 해마다 2명씩 한국돈 100만 원의 상금을 주는 인도의 학회를 비롯해, 후원자가 필요한 곳에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제 주변에는 남을 위해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국어교실만 해도, 쟁쟁한 사람들이 재능기부로 강의를 해주겠다고 합니다. 며칠 전 지인들과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후원금을 내며 강의하자는 말이 나오자, 모두가 박수를 치며 찬성을 했지요. 통영에는 남을 돕고 싶어하는 분들이 많아요.”

정교수는 이들을 의미 있는 일에 연결시켜 주는 것도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교민사회에 책을 기증하는 일을 하고 있던 정교수는 한국어교실 학생들에게도 책 한 보따리를 챙겨와 기증했다. 탈북자나 다른 사회 소외자에 대한 관심도 크다.

정한식 교수는 은퇴를 하면서 지금껏 살아온 인생을 담은 수필집 회상 65’를 펴냈다. 돌아보면 지난날의 삶은 크나큰 혜택이고 감사다. 이제 앞으로의 삶은 받은 은혜를 돌려주는 삶이기를 바란다.

우리나라가 1990년을 기점으로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가 되었듯이, 이제껏 은혜를 받고 살아왔으니 갚고 살려 합니다.”

80세까지 갚고 산다고 해도, 남은 시간은 15. 정한식 교수는 그동안 받고 살아온 은혜를 갚을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적어 마음이 바쁘다.

그에게 은퇴는 더이상 종착역이 아니다. 인생 2막을 시작하는 새로운 기착지(寄着地)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