벅수골 이상철 배우

벅수골 소극장에서 만난 이상철 배우

“연극 한번 해 볼래?”

고등학교 은사님의 이 한 마디가 이상철 배우(63)의 인생을 바꿨다. 희곡을 쓰는 은사님의 친구가 극단을 만들게 됐는데, 그저 “네” 하고 따라간 것이 그의 연극 인생의 시작이었다. 1976년, 서울 ‘넝쿨’ 극단이었다.

혼자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내성적인 소년의 마음속에 어떻게 이런 열정이 숨어 있었던 걸까? 극단에서 하는 일이라곤 전화 받고 청소하는 것뿐이었지만 이상철 배우는 그때부터 연극마니아가 되어, 연극이 공연되는 곳이라면 열 일 제치고 뛰어갔다.

남산 드라마센터, 덕수궁 옆 마당세실극장, 대학로…. 하도 다니다 보니 극장에서 청년 상철을 알아보고 “왔니?” 하고는, 슬쩍 뒷문으로 들여보내주기도 했다.

이듬해 이상철 배우는 본격적으로 연극을 배우고 싶어 극단 ‘칠유’에 들어갔다. 첫 극단보다 훨씬 규모가 있는 극단이었다. 청년 상철은 조금씩 단역을 하기도 하며, ‘연극’이라는 매력적인 장르에 더 빠져들었다.

연기 외에도 극단의 일을 돕는다.

생활비가 나오는 곳은 작은 영화관이었다. 그 당시에는 피카디리, 단성사 같은 개봉 영화관에서 영화를 개봉해 일정한 기간 상영한 다음에 2류, 3류 극장으로 영화가 내려왔다.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청년 상철은 서울 강북에 있는 극장에서 간판을 그렸다. 주인공 얼굴이야 실장님이 그리는 것이었고, 배경 색깔이나 본을 뜨는 일을 했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일이었기에, 그만큼 연극에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다.

“개봉관인 피카디리나 단성사 같은 곳에 심부름을 많이 다녔습니다. 미술실을 드나드는 심부름이라, 관계자실로 들어가고 나면 마음껏 영화를 볼 수 있었지요.”

배우의 몸짓 하나, 대사 한마디에 전율하며 영화관과 연극 공연장을 오간 지 수년, 그는 몇 가지 단역을 맡으며 연기를 배워 갔다.

그러던 1983년, 그는 갑작스런 막내동생의 부고를 듣고 고향인 통영으로 내려왔다.

“아주 착하고 사려 깊은 문학소년이었어요. 그애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것을 식구들은 아무도 몰랐어요. 저도 나중에야 일기장을 보고 알았으니까요.”

남은 가족들의 상실감과 회한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젊은 상철은 아무것도 하기 싫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절망의 시간의 시간을 1년 가까이 보냈다. 다시 서울로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해 가을, 이상철 배우는 통영 벅수골 극단의 공연을 보러 가게 됐다. 1981년 창단한 벅수골은 당시 경남연극제에서 대상을 차지하며 전국연극제 출전하기도 하는 등 비상하는 극단으로 의기투합하고 있었다.

“이 친구가 서울에서 연극을 했어요.”

그를 아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벅수골 대표인 장현 선생에게 소개했고, 그는 그날 벅수골 식구들의 뒤풀이에 끼어 오랜만에 연극에 대해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그날의 인사를 인연으로 그는 이듬해인 1984년부터 벅수골 식구가 됐다. 그해 그는 모노드라마 ‘약장수’에 출연하며 통영의 배우로 자리 잡았다.

퓨전춘향전, 태풍, 해평들녘에 핀 꽃, 쇠메소리 등등, 벅수골의 역사가 이상철 배우의 연기 역사다.

“퓨전 춘향전이 기억에 남아요. 배우들 옷을 갈아입을 수 있는 텐트 하나 만들고 자리를 펴면 바로 무대가 되는 마당극 스타일의 연극이었죠. 저는 그런 연극이 좋더라고요.”

'나의 아름다운 백합' 연습중

변학도 역을 맡아 통영뿐 아니라 전라도까지 섬이란 섬은 다 돌고, 미국까지 진출해 8년 동안 공연한 작품이었다.

2015년에 열린 제33회 전국연극제에서는 극단 벅수골이 ‘통영 나비의 꿈’으로 은상을 받았다. 통영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이 겪은 동백림 사건과 시인 백석의 연애담을 엮은 작품이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연출력과 배우들의 힘 있는 연기력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이 작품에서 이상철 배우는 ‘아재’ 역을 맡아 통영개타령을 부르며 열연했다. 그리고 모든 배우들이 꿈꾸는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

오는 21일, 극단 벅수골은 통영연극예술제 폐막작품으로 창작연극 ‘나의 아름다운 백합’을 무대에 올린다. 이상철 배우는 주인공인 나전칠기 장인이다.

“인생을 정리하는 80대 장인 역할이에요. 나전칠기를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 그만두려는 마음을 품고 있는 늙고 초라한 장인이지요.”

하지만 그는 젊은날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해야 했던 과거를 갖고 있다. 수감기간 동안 가정은 망가졌고, 나전칠기가 사양산업이 되고 먹고살기 어려워지면서 아들 며느리를 잃게 된 슬픔도 가슴에 담고 있다.

그의 비밀은 서울에서 기자 생활을 하던 손녀가 내려오고 나전칠기를 배우겠다는 제자가 나타나면서 조금씩 밝혀진다. 손녀도, 제자도 나름의 사연을 갖고 할아버지의 공방을 찾은 것이다.

좌우가 나뉘어져 있던 한국사의 슬픈 상황과 전통 공예의 몰락 같은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역사와 장인의 삶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80대 중반의 복잡한 인물을 잘 표현해야 하는 숙제를 받았습니다.”

40여 년 완숙한 배우는 응집된 한국사의 음영을 어떻게 풀어낼까?

2019 통영연극예술축제의 폐막 공연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2015년에 열린 제33회 전국연극제에서  ‘통영 나비의 꿈’으로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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