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장 뗀 1년간의 시 경연에서 최종 우승, 대성 가능성 확인

인기 있는 예능프로 중에 ‘복면가왕’이 있다. 이름 떼고, 경력 떼고 오직 목소리로만 겨루는 가수들의 진검 승부를 다루는 프로그램이다.

시인들도 복면가왕 식으로 좋은 시를 가려뽑는 대회가 있다. 권위 있는 시 전문 계간지인 ‘시산맥’에서 3회째 하고 있는 ‘시여, 눈을 감아라’ 특별기획이 바로 그것.

2018년 여름호부터 2019년 여름호까지 1년 동안의 시 경연에서 통영의 딸 김희준 시인(26)이 최종 수상자가 됐다. 시인의 이름이나 등단지, 지명도, 등단년도에 기대지 않은 블라인드 심사에서, 통영의 젊은 시인이 최종 우승자가 된 것이다.

‘시여, 눈을 감아라’는 한 작품으로 수상자를 가리는 일반적인 문학상보다 더 치열한 방법으로 우승자를 가린다.

맨 처음에 시인들이 한꺼번에 작품을 투고한 가운데 오직 작품만을 보고 16명을 먼저 뽑는다. 16강에 선정된 시인들이 다시 신작시를 발표하여 8명 선정, 다음 호에 8명이 신작시를 발표하여 4명을 선정한다. 이런 식으로 결승까지 1명으로 압축되는 토너먼트 시 경연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더 좋은 작품을 선보여야 최종 우승자가 될 수 있다.

김희준 시인의 수상이 더 값진 건 고른 작품 수준을 담보해야 하는 경연 방식 때문이다. 간혹 젊은 시인들 가운데는 뛰어난 발상의 시를 꺼내놓는 것보다 고른 수준의 작품을 내놓는 것이 더 어려운 경우가 있다.

“발상이 독특하며 목소리가 신선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김희준 시인은 “지금까지 시인들이 만들어 놓은 서정적 문맥이나 일상적 논리를 상상과 환상으로 끌어올려 전혀 다른 언어의 질서가 주는 긴장을 제시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김희준 시인의 시는 유동성 물질같이 가뿐하고 자유롭게 사방으로 움직이면서 몽환적이고 동화적인 상상력이 남다르다.

김희준 시인은 수상소감에서 “기회를 주신 시산맥과 심사위원님께 깊은 마음 전한다. 더 열심히 하라는 회초리인 것 같아 몸이 아프다. 세상 모든 것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어머니의 다정한 손에게 영광을 돌린다.”고 밝혔다.

김 시인의 어머니는 ‘한국 현대시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강재남 시인이다. 강 시인은 통영에서 태어나 2010년 ‘시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2017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선정하는 한국문화예술유망작가에 선정돼 창작지원금을 받았고, 제6회 한국동서문학상을 받았다.

‘통영의 모녀 시인’이라고도 불리는 강재남 시인과 김희준 시인은 지난해 시산맥이 우수한 현대시 96편을 가려 출판한 시집 ‘감성’에 나란히 작품을 올리기도 했다.

아직 스물여섯 살, 얼굴을 가린 진검 승부에서 가능성을 보여준 이 젊은 시인이, 유치환, 김춘수, 김상옥 등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들을 낳았던 통영 문학사에 새로운 역사를 더하게 될지 자못 기대된다.

 

통영 푸른새벽장학생 출신의 기대 받는 젊은 시인 김희준

김희준 시인은 통영에서 태어나 재학시절부터 전국의 백일장을 휩쓸었다. 2013년 개천문학신인상과 2015년 개천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통영장학금의 우수장학제도인 ‘푸른새벽장학생’의 첫 수혜자이기도 하다.

2017년 ‘머메이드 구름을 읽어내는 방식’ 등 5편으로 시인동네 신인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했으며, 2018년에는 올해의 좋은 시 100선에 ‘시집’이, 현대시선 50선에 ‘로라반정 0.5mg’이 선정되었다.

김희준 시인은 국립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국립경상대학교 개교 70주년을 맞아 ‘자랑스러운 개척인 7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문단의 젊은 유망주로 주목받고 있는 김희준 시인은 현재 월간 ‘시인동네’에서 ‘김희준의 행성표류기’라는 코너를 맡아 연재 중이며, 여러 지역으로 특강을 다니며 차분하게 시인의 길을 걷고 있다.

 

구름 포비아에 감염된 태양과 잠들지 않는 티볼리 공원, 그러나 하나 빼고 완벽한 목마


김희준

여름이 오기 전에 헤어져

목마를 길들이는 일에 한 계절이 지났다 서커스단이 훔쳐간 태양이 안데르센 천막으로 팔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공중으로 산란하는 바람,

초원을 달리는 소년과 태엽에 감긴 소년은 어디로 갔을까

바람개비가 예보 없이 쏟아진다 찢긴 구름은 흰 목마가 된다 여름의 단면에서 쏙독새가 태어난다

오르골을 열면 구름을 타고 날아오르는 소년, 관람차에선 낡고 경쾌한 방식으로 말이 달리고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새에게 긴 막대를 줘야지

프로펠러 프로펠러, 쏙도새가 말을 배우는 곳에서 소년이 알을 품는다 목마를 포란하는 밤이 스스로 회전한다

소년은 밤의 활동을 해독하는 사람,

여름이 지나간 방향으로 분실된 천문학이 기록된다

거꾸로 돌리는 거야,

계절의 안쪽에서 소년은 소년이 된다

안부를 물을 수 없다 그리하여 구름이 고장난 나침반과 떠났다는 말은 믿지 않기로 한다

소년이 회전목마를 탄다

어지럽지 않니?

음각된 정오가 구석에서 파기된다 이미 그해 여름이 지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한차례 바람개비가 내린다

바람의 태엽을 달고 태어난 목마가 초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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