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 첫 삼도수군통제영을 만들면서, 인근의 작은 섬들은 모두 전쟁과 무관할 수 없었다. 한산도 아래, 용초도와 장사도 사이에 있는 죽도는 대나무가 대규모 군락을 이루고 있어, 병장기 재료를 공급했다.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마을 뒤편 숲까지 대숲이었는데, 지금은 밭농사를 위해 개간하면서 거의 사라졌다.

임진왜란 무렵, 진양강씨와 경주정씨가 입도해 정착했는데, 정씨 집안이 더 오래 남았다.

죽도는 한때 부자(富者) 섬으로 유명했다. 1970~80년대 성행했던 삼치잡이 덕이다.

죽도 어머니들이 차려내는 호화로운 상차림

삼치를 좋아하는 일본에서는 우리 남해 청정해역에서 잡은 삼치를 좋은 값에 사갔다. 70년대에 일본 무역선이 죽도 앞에서, 큰 삼치 한 마리를 바로 현금 7~8천원으로 바꿔줬다. 죽도 사람들은 그때를 “급전 쓰기가 은행보다 빨랐다.”고 회고한다.

아침 일찍 배를 타고 나가 긁듯이 삼치를 잡아서, 저녁때 바로 수출하는 구조였다.

폐교된 죽도분교

바다 밑도 황금어장이어서, 해녀들이 섬에 들어와 살면서 물질을 했다. 70년대 죽도 주민은 99세대, 500여 명이었다고 한다. 거기에 해녀 120여 명이 집집마다 세를 얻어 8월까지 살다가 제주도로 돌아가곤 했다.

한산면의 분교로 가장 먼저 생긴 죽도분교는 1945년 5월 15일 개교해 졸업생 533명을 배출하고 1994년에 폐교됐다.

1990년대 이후, 참치잡이가 기울고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면서 섬은 쇠락했다.

지금 죽도에는 49세대가 산다. 그중 고기를 잡는 어가는 8가구다. 작년에 귀어를 하겠다고 들어온 가구가 2가구. 실제로 섬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대개 홀로 사는 할머니들이다.

통영항여객선 터미널에서 하루 두 번 차도선이 운항한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죽도는 남해안 마을 중 유일하게 ‘남해안별신굿’을 전승하고 있다. 마을의 평안과 어민들이 풍어와 장수를 비는 남해안별신굿은 70년대 이후 급격히 사라져, 이제는 죽도마을에만 남았다.

한가로운 낚시꾼이 죽도를 찾는다.

 

죽도마을 일꾼 정지홍 이장

 

온 마을 일꾼 정지홍 이장

정지홍 이장은 죽도에서 나고 자라 마을의 전성시대인 70년대에 죽도마을금고 서기를 지냈다. 결혼하고 얼마 뒤 부산으로 진출, 그곳에서 자녀들을 키우며 살았다.

그러나 고향에 있는 부모님은 날로 쇠약해져 갔고, 고향은 빈한한 섬마을이 되어 갔다.

정지홍 이장은 2003년도에 죽도에 재기중소기업개발원을 세워놓고 부산과 죽도를 오가며 생활하다가, 2007년 아예 도시생활을 접고 섬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0여 년, 정지홍 이장은 마을 심부름꾼이 됐다. 이장, 어촌 계장, 자율공동체위원장, 노인회 총무 등 일이란 일은 도맡아 한다.

“누가 할 사람이 있나? 2013년에 이장이 됐는데, 어머니들뿐이니 내가 할 수밖에.”

정지홍 이장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남해안별신굿을 되살리는 것이었다. 남해안별신굿은 섬이 노령화되면서 겨우 명맥만 유지되고 있었다.

“조모, 우리 때 이런 전통이 없어져야 되겠습니까? 한번 해보입시더.”

정지홍 이장은 마을 어른들을 독려했다. 종손 집이어서 촌수가 낮은 까닭에 나이 차이가 몇 살 나지 않아도 대부분 조모, 삼촌 그랬다.

“이장 하는 일이라모, 도와야지.”

마을 어른들은 다시 힘을 내 정성스런 상을 차렸고, 통영시와 문화재청이 손을 잡아줬다. 죽도마을의 남해안별신굿은 지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달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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