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이 사는법-남망산 지킴이 방준호 관리소장

▲ 참을 인(忍) 자를 새긴 지팡이를 짚고 남망산을 지키는 방준호 소장.

남망산에 오르면 통영시민문화회관을 지나 작은 소나무 숲에 이르게 된다. 이순신공원이 조성되기 전, 통영 초·중·고 학생들의 단골 소풍지였던 이 소나무 숲에는 상대적으로 작아져버린 이순신동상이 세월의 풍상을 그대로 몸에 받은 채 소박하게 서 있다. 그 옆에 있는 작은 관리사무소에서 방준호 소장(49)은 15년째 남망산 지킴이로 살고 있다.

“사람 참 좋지요. 여름이면 시원한 박카스, 겨울이면 따뜻한 호빵을 제 돈으로 사가지고 올라와 공공근로 오신 노인분들에게 나눠주고 부모형제처럼 살갑게 대합디다.”

1년 전부터 함께 일하게 된 배청식 씨의 증언이다. 알고는 있던 사람이지만 한 공간에서 근무하는 인연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막상 같이 일해 보니 보이지 않는 선행을 하고 있더라는 것.

“2년 전까지 공익요원들이 남망산에 배치됐어요.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아프거나 사고를 치는 아이들이 많이 있었죠.”

▲ 같이 일하게 된 배청식(왼쪽) 씨는 방 소장이 사는 새 삶의 증인이다.

사연 있는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방 소장은 따뜻한 음료와 호빵을 품에 안고 남망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떤 공익요원에게는 용돈이나 생활비를 찔러 주기도 했다.

방준호 소장은 남망산 지킴이가 된 15년 동안 공익요원과 공공근로 어르신들에게 음료수를 대접하고 있다.

그 자신이 아이 셋과, 팔순 노모, 장애자 형을 부양하는 가장이지만, 방황하는 젊은이들과 추위 속에 수고하시는 어르신들에게 뭐라도 드리고픈 마음이었다고.

“목마른 사람에게 시원한 물 한 그릇 대접하는 마음으로 하는 거지요.”

방 소장의 이런 한 걸음, 한 걸음은 과거에 대한 참회이고 종교적 수양이다.

사실 방준호, 하면 통영에서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통영초 교사였던 방영포 할아버지는 형님인 방덕포 할아버지와 1976년 통영고등학교에 도서관을 기증하셨다. 그분들이 희사한 덕포도서관은 지금도 컴퓨터실로 쓰이고 있다.

일본인 교장과 마찰 끝에 교사를 그만둔 할아버지는 중앙시장에서 포목점을 열어 돈을 벌었고, 충무극장을 만들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같이 운영한 충무극장은 방 소장이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통영의 문화1번지였다.

어린 준호는 극장의 화려한 무대와 뒷골목 건달들의 알력을 자연스럽게 접하며 자랐다. 극장 뒤에서는 통영의 내로라하는 건달들과 서울의 건달들이 자주 얽혔다. 태권도와 격투기를 배웠던 어린 준호는 건달 형들이 탐내는 극장집 아들이었다.

“나훈아, 하춘화, 이주일 같은 유명 연예인이 와서 공연을 했어요. 친구들 사이에서도 ‘극장집 아들’은 인기가 좋았지요. 초등학교 5학년 때 불이 나서 극장 문을 닫았습니다.”

그 뒤에 극장은 충무비치호텔로 바뀌었다. 호텔집 아들이 된 준호는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자연스럽게 주먹세계에 들어가게 됐다.

“중2 때부터 형들을 따라다녔어요. 왠지 멋져 보여 ‘삼촌, 삼촌’ 하며 따라다니다가, ‘형님’이 된 거지요. 영웅심리 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아요.”

주먹이 꽤 단단했던 방 소장은 여러 패싸움판에서 태권도와 격투기 유단자의 실력을 인정받아 이십대 초반에 행동대장이 되었다.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었다.

▲ 방 소장의 숨은 선행이 지역사회봉사상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문제는 1992년에 터졌다.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방 소장은 정모 후보 편에 서서 허모 후보 쪽 사람들과 싸움을 했다. 각목과 쇠파이프가 오가는 치열한 싸움에서, 상대쪽 사람이 심한 부상을 입었다. 누군가 책임을 져야 했다. 행동대장이었던 방 소장은 스물세 살 꽃다운 나이에 수감됐다.

“갇혀 보니, 인생이 참 무상합디다. 옳다고 생각한 일이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니었고, 적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적이 아니었지요.”

5개월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방 소장은 폭력의 위험과 인생무상을 깊이 마음에 새기게 됐다. 하지만 주먹세계에서 나오는 일은 쉽지 않았다. 불교에 귀의해 마음의 평화를 찾기도 했지만, 오히려 1998년부터 이어진 2차 조계종사태에 휘말려 2000년부터는 4년간 도피생활을 하게 됐다.

“그 사이 형제 같은 친구들이 죽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고 갇히기도 했어요. 주먹세계의 종말이라는 것이 참 허무했지요.”

편을 가른 폭력은 늘 상대편의 살의(殺意) 앞에 노출돼 있는 삶이었다. 죽던가, 죽이던가 해야 하는 살벌한 줄타기 속에서 어떤 친구는 유명을 달리하기도 하고, 마약에 취해 폐인이 되기도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사랑하던 친구는 무기수가 되었다.

▲ 남망산 소나무 숲 속에 있는 관리사무소가 방 소장의 일터다.

2004년 3월, 원만히 합의를 이뤄 도피생활을 끝낸 방 소장은 남망산 공원관리소에 취직을 하면서 떳떳하게 사회로 복귀했다.

“아는 형님이 손을 씻고 불법에 귀의하도록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형님과 같이 한 달에 세 번씩 중앙시장 앞 뗏목에서 방생을 하고, 티베트 다람살라에 있었던 청전스님을 모시고 수계법회도 개최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통영과 마산, 전주 교도소에 불서 700권을 보시하기도 했습니다.”

방생을 시작한 지는 어느덧 20년이 됐다. 방 소장의 이런 선행은 폭력으로 얼룩진 젊은 날에 대한 참회이며 다시 태어난 인생에 대한 감사다. 또한 무기수로 복역중인 친구의 감형과 귀환을 염원하는 기도이기도 하다.

“아직도 감옥에 있는 형제와 같은 친구를 생각하며 덕을 쌓는 마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방 소장은 지금까지 옥바라지를 하고 있는 친구의 감형을 기원하며 오늘도 남망산을 지킨다.

▲ 무기수로 복역중인 친구가 보내 준, 평정심과 용기와 지혜를 구하는 글귀를 관리사무소 안에 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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