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염속의 천사(1994년)

1994년 가을에 예음문화재단이 기획한 윤이상음악제가 개최될 예정이었다. 선생의 이름으로 열리는 음악회 일정에 맞추어, 선생도 조건이 허락되면 한국 방문을 희망했는데, 귀국을 위한 선생의 유일한 조건은 명예회복이었다.

“대통령께서 저의 명예를 회복하여 주시면 저의 고국 방문은 성공할 것입니다. 꿈에도 잊지 않던 그 고향의 앞바다가 저를 부르고 있습니다. 고향에 가서 선산의 묘 앞에 향을 피우고 무릎을 꿇어야 하겠습니다.”(1994년 6월 26일,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그러나 한국 정부는 선생의 명예회복에 대해여 소극적이었다. 오히려 선생에게 지난날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쳐 미안하다는 내용의 사과를 요구했고, 선생은 그 요구를 거절했다.

“나는 평생 깨끗하게 살아왔으며 민족 전체의 공통된 양심이 있다면 그 양심에 조금도 죄 지은 일이 없으며 티끌만치도 음흉한 자취가 없습니다.”(1994년 8월 16일, 이홍구 통일원장관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이러한 곡절을 거쳐 선생은 결국 귀국을 단념하게 되었다.

1994년 9월 17일 선생의 77세 생일에 “화염속의 천사”가 완성되었다. 1991년 봄 민주화 투쟁 때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 분신한 젊은이들을 추모한 곡으로, 선생이 혼신의 힘을 소진하며 쓴 마지막 작품이다.

필생의 작곡을 다 마친 선생은 병고에 시달리며 마지막 한 숨까지 고향을 그리워하다가, 먼 이국땅에서 영면했다. 1995년 11월 3일 16시 20분.

선생이 돌아가신 지 20여 년이 흐른 2017년. 선생의 탄생 백주년을 기념하면서 통영과 베를린은 선생의 유골을 이장하기로 전격 합의했고, 다음 해 봄 선생은 꿈에 그리던 고향땅에 돌아와 묻혔다.

*2022년 통영국제음악제 20주년을 맞아 윤이상 선생의 자취를 돌아본 ‘사진으로 만나는 윤이상’ 칼럼을 25회를 끝으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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