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기 목사

③ 성욕은 사회 문화적인 영향을 받는다

지난번 글에서는 성경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의미에서도 동성애와 이성애의 구분은 성적 행위로 구분된다는 점을 밝혔다. 그리고 ‘그렇더라도 성적 취향을 다양성의 하나로 존중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과 함께, ‘성적 취향은 내가 선택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화두를 던졌다.

그러나 성행위에 국한되는 성적 취향이란 선택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선택과 절제가 가능한 영역이다. 

사람의 성욕은 짐승의 것과 달라서, 때와 장소와 대상을 가린다. 그뿐 아니라 사회 문화적 영향을 깊이 받기에 이성의 힘으로 통제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성경이 금하는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는 것을 하지 말라’는 명령은 실천 가능한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문화는 가족 간의 성관계를 금한다. 친척은 물론 심지어 과거에는 동성동본의 결혼도 허락하지 않았다. 가족 간에 사고가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다수 국민이 근친상간을 잘못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문화가 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가 살았던 기원전 이집트는 그렇지 않았다. 클레오파트라는 당시 이집트 왕실의 결혼 풍토에 따라 너무도 당연하게 “아버지와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기원전 51년, 부왕이 세상을 떠나자 18세의 나이에 13세였던 남동생과 결혼했다.
문화가 성욕을 조정하는 예이다.

좀더 가까운 시대, 다른 문화를 생각해 보자. 지금도 이슬람 문화에서는 아버지뻘, 할아버지뻘 되는 사람과 결혼하는 어린 신부들이 많다.

해리포터를 제치고 24주간 아마존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문제작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탈레반 집권 하의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차별을 밀도 있게 펼쳐내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2부를 시작하면서, 64세인 라시드는 폭격에 맞아 죽어가는 15세의 라일라를 구해 주고는, 그녀를 세 번째 아내로 맞는다. 30년 아래인 두 번째 아내 마리암을 ‘늙은 여자’라고 학대하며 49년 연하인 라일라를 다시 맞는 것이다.

이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말하자는 게 아니라, 그의 문화가 그것을 허용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 보자는 것이다. 라시드는 “길을 막고 물어봐. 내가 그애를 아내로 맞는 건 너무나 마땅한 일이야. 난 권리가 있다구.”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1993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선의를 베푼 노인이 15세 소녀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이 당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노인이 15세의 소녀를 치료해 주고는 “그애를 아내로 맞을 권리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행여 성적인 끌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라시드가 보여주는 것처럼 당당한 동인(動因)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사회문화적인 장벽이 막고 있기 때문이다.

수도승이나 수녀님, 수절과부의 예만 보아도, 성적인 욕망과 충동은 때와 장소에 따라, 또는 문화적인 장벽에 따라 이성적으로 조절 가능한 영역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순결을 지켜야 할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 내 주변에는 현재도 그런 가치로 사는 사람이 많다. 이 또한 문화적 영향 속에서 성적인 욕망이 지배되는 현상 중 하나이다.

특수한 예외를 들어 반박할 말도 있는 줄 안다. 파계승이나 물레방앗간의 뒷이야기도 얼마든지 있는 줄 안다. 그러나 모든 경우,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성적 욕망을 누르며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보편적인 성정을 가진 보통 사람은 사회 문화의 제한 속에서 성적인 욕망을 지지받거나 저해 받는 가운데 살고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동성애자들의 성적 욕망이 더한지는 알 수 없으나, 이성 간의 성적 끌림은 때와 장소와 대상을 가릴 수 있다. 미루어 짐작컨대 동성 간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런 차원에서, 성경은 절제할 수 있는 욕망의 하나로 동성 간의 성관계를 금지한다. “뜨겁게 사랑하겠거든 사랑하라.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벗어나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생긴다.
“성경과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라. 하나님과 아무 관계없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있더라도 멱살을 잡고 싶은 사람들에게까지 이 무리하고 폭력적인(?) 수행을 강요하지 말고!”

그 말대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동성애자들에게까지 성경을 들이대며 수절과부처럼 플라토닉러브만 하며 살라고 할 수는 없다. 실제로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명령이기도 하다.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렇게 살아라.” 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비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의 법을 지키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왜 기독교인들은 동성애 문제만 나오면 피켓을 들고 거리로 뛰어나오는 것일까?
다음 호에서는 마지막으로 이에 대해서 살펴보고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다음호에 계속>

저작권자 © 통영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