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민족통일음악회(1990년)

“조국 분단 이후 43년, 오늘처럼 전 민족이 통일을 염원하고 그를 위하여 행동에 옮긴 때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의 정치적 협상을 앞당겨 우선 온 민족이 동질성을 되찾고 그동안 쌓였던 복잡다단한 감정과 갈등을 풀고 정치이념을 초월한 민족의 화합을 위하여 우선 대행사를 마련하여 전 민족에게 고갈증을 풀어주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민족합동음악축전을 마련하여 이 행사가 우리 강토에서뿐 아니라 전 세계에 소개되어 우리 땅에서 세계평화에의 커다란 희망을 보여 주어야 한다.”(민족합동음악축전 실무 절차안 중에서)

1987년 9월 5일, 일본 오사카에서 국제심포지엄을 마친 선생은 마이니찌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남북 정부에 휴전선에서의 평화의 음악축전을 제의했고, 1988년 7월 1일 공식적으로 남북 양 정부에 민족합동음악축전을 제안했다.

북한에서는 즉시 동의했고, 한국에서도 예총이 동의하고 언론사들이 호응하는 등, 남북 양측에서 받아들여진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었는데, 행사를 위한 선생의 한국 방문 문제와, 방문 시 광주 참배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작위적으로 만들어지면서 행사는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한번 마음먹은 민족 화해의 음악회를 휴전선에서는 못하더라도 평양과 서울을 오고가며 할 수 있지 않느냐.’ 선생은 다시 결심하고 남북통일음악제를 준비했다. 선생의 염원은 1990년에 결실을 맺었다.

황병기를 단장으로 김덕수, 노동은 등이 포함된 서울전통음악연주단 일행 17명이 1990년 10월 14일 분단 45년 만에 민간인으로는 최초로 분단의 장벽을 넘어 1990년 10월 18일부터 10월 23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통일음악회 참석했고, 그해 12월 성동춘을 단장으로 한 평양음악단 33명이 판문점을 통과해 서울송년의 밤에서 이틀간 공연을 하고 돌아갔다.

남북한의 음악 교류를 제안하고 그 결실을 누린 이 시간이 아마도 선생의 인생에서 가장 가슴 충만했던 득의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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