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여 영원히 연주 장면(1987년)<br>
광주여 영원히 연주 장면(1987년)

1980년 5월 17일. 이국의 라디오에서 조국의 소식을 들은 선생은 그 자리에서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모든 일을 중단하고 라디오와 티브이로 광주를 지켜본 선생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처참한 살인 진압의 현장을 보고 통곡을 했다.

그때 마침 서독방송국이 대관현악을 위촉해 왔고, 동족이 동족을 짓밟는 악마적 사건을 인류 역사에 남겨 모든 독재자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 작곡한 곡이 “광주여 영원히!”이다.

이 작품을 쓸 때 선생은 기존 자신의 스타일에서 과감히 벗어나, 온 세계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전시적인 표제음악으로 썼다. 평론의 관점을 무시하고, 광주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제시하는 것이 선생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선생은 작곡하는 동안 눈물을 흘리며 집안을 왔다 갔다 했고, 분노와 슬픔의 격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1980년 12월 30일 초안에 들어간 이 곡은 1981년 4월 4일에 완성되었고, 1984년 캐나다에서 열린 국제현대음악제에서 독일 대표작으로 연주되어 각광을 받았다.

1980년 광주 사태의 선동자라는 누명 쓰고 김대중이 다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선생은 김대중 구명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서독 국제사회당 당수 빌리 브란트를 여러 번 찾아가 호소했고, 1980년 6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사회주의인터(SI) 간사회의에서 광주의 만행을 준열히 규탄했다.

이 당시에 벌어진 어이없는 일은 전두환 정권이 선생을 초청한 것이다. 광주의 저항을 진압하고 어느 정도 정권이 안정기에 들어간 전두환 정권은 국내외 명사들의 포섭에 많은 공을 들였는데, 관변 예술가와 정권 실세들을 보내 선생의 귀국을 요청했다.

“광주 학살 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씻을 수 없는 업이오. 나쁜 운명이오. 역사는 언제든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오. 하루라도 빠를수록 좋소. 전두환은 광주에 큰 위령탑을 세우고 자신이 제주가 되어 학살당한 영혼에게 또 광주 주민에게 빌어야 하오. 그것을 할 때 나는 큰 진혼곡을 써서 광주의 영령에게 바치겠소. 그렇게 될 때 나는 떳떳이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을 것이오.”

정치적 목적의 귀국 요청에 대한 선생의 답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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