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나전 되살린 ‘늘가 이성운’을 기억하다

2014.3 잡지에 실린 이성운 선생
2014.3 잡지에 실린 이성운 선생
자화상
자화상

통영 나전칠기를 전국적인 붐으로 일으킨 드라마가 있었다. 1978년에 방송된 이낙훈 주연의 TBC 일일연속극 ‘언약’이다. 채널의 선택권이 없던 시절, 이 드라마는 전국민의 안방을 찾아갔다. 시청자들은 극 중 이낙훈의 작품을 보며 “누구 작품인가?”, “어디 가면 살 수 있나?” 하는 궁금증을 가졌다.

그리고 그 실제 작가가 서울 새로나백화점에서 나전칠기 전시회를 열었을 때, 그야말로 ‘구름 떼처럼’ 전시회를 찾았다. 신문마다 전시회를 대서특필했다. 사람들은 전통기법의 나전칠기가 이렇게 세련된 ‘현대’의 옷을 입을 수 있다는 데 놀랐다. ‘늘가 이성운’ 선생의 이야기다.

“당시에 통영에서 물건이 없어서 못 판다는 말이 나왔어요. 선생님이 통영의 장인이고, 통영에 가면 최고 나전칠기를 살 수 있다는 게 알려졌으니까요.”

故이성운 선생의 아내인 이정자 여사(80세)의 증언이다.

이성운 선생은 ‘늘 간다’는 뜻으로 본인의 호를 ‘늘가’라고 지었다. 순우리말이다 보니 오히려 뜻을 설명해야 하는 모순이 있었지만, 선생은 이 ‘늘가’라는 호를 좌우명으로 삼고, 평생 전통의 부활에 매달려 할패법(자개조각에 인공적으로 균열을 만들어 둥근 기물 등에 붙이는 전통 기법)을 되살렸다. 1986년에는 이 할패법에 현대적 문양을 도입시킨 ‘나전모란문서함’으로 동아일보에서 주최한 동아공예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그는 독창적 회화 기법과 기하하적 문양으로 60~80년 당시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이성운 선생은 1933년 욕지도에서 태어났다. 통영상업학교를 다니다가 형편이 어려워져서, 1950년 세병관 앞에 생긴 경남도립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이하 양성소)의 1기생이 되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었던 선생은 양성소에서 잊을 수 없는 스승들을 만나게 된다. 나전칠기 최고의 장인이었던 김봉룡 선생, 최고의 공예가였던 유강렬 선생, 최고의 화가였던 이중섭 선생이 그들이다. 특히 북한이 고향인 유강렬과 이중섭은 같은 자취방에서 생활했다. 욕지도가 집인 이성운 학생은 선생님들의 심부름꾼이었다.

“밥은 늘 선생님(이성운)이 했대요. 유강렬 선생님이 말하길 ‘냄비에서 딱딱딱 소리가 나거든 밥이 된 줄 알라’ 해서 불 옆에서 꼼짝도 안 하고 냄비를 지켜보곤 했다고 해요. 같이 먹고 같이 그림을 그리고, 그냥 허물없이 같이 산 거예요. 당시에는 그 선생님들이 그렇게 유명한 사람들인 줄 몰랐다고 해요.”

특히 그림을 좋아했기 때문에 이성운은 이중섭이 스케치를 하러 통영 시내에 나갈 때면 같이 따라가 같이 그림을 그리곤 했다. 말로 이래라, 저래라 하는 법은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스승의 그림은 청년 이성운의 그림 속에 스며들었다. 때로 이중섭 선생이 “이군, 그림에 소질 있는데?” 하는 칭찬에 힘을 얻어가면서.

1953년 2월이나 3월경 어느 주말, 수업을 마친 이성운은 강구안 부두에서 욕지도행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이중섭이 생각에 잠긴 듯 느릿느릿 지나다가 “집에 가는가?” 하더니, 함께 가자며 화구를 챙겨 따라나섰다. 2박 3일의 짧은 스케치 여행, 이중섭은 <욕지도 풍경>을 비롯해 수많은 작품을 스케치했다. 나중에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한 유명한 그림 <황소>가 전시되었을 때, 욕지도 사람들은 “저거 우리 마을 언덕배기 삼거리에 있는 씨황소 아이가?” 했단다.

“저희 시어머니가 말씀하시길, 말도 없이 선생님을 데리고 오니 대접할 것도 없고 너무 당황스러웠답니다. 첫날 밤은 선착장 근처 부잣집에서 자고 둘쨋날 저희 집에서 주무셨다는데, 저녁에 들어오니 선생이나 애나 얼굴과 옷이 새까맣게 돼서 신나게 부엌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더랍니다. 가마솥 밑바닥에 눌러붙은 그을음을 손으로 긁어서 그걸로 그림을 그린 것이지요.”

당시 선생의 어머니는 “철딱서니 없기가 선생이나 애나 똑같다. 애가 한다고 해도 말릴 일이지, 선생이 나서서 손으로 그게 할 일이가?” 했단다. 나중에 물을 끼얹어가며 그 낙서(?)를 지우느라고 애를 썼다면서….

이후 이성운 선생은 가장 ‘한국적인’ 나전칠기 기법을 되살리는 한편, 가장 ‘회화적인’ 나전칠기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1966년의 매일경제신문은 이성운을 ‘한국의 피카소’라고 표현하며 “완벽한 전통 재현과 왕성한 실험성 추구로 정평이 나 있는 작가”라고 소개했다.

1978년 KBS ‘인간시대’는 이성운 선생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방송했다. 1984년에는 교황청 박물관에서 선생에게 작품 제작을 주문하기도 했다.

이런 선생이 한순간 나전칠기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 건 갑자기 찾아온 질병 때문이다.

“1999년 67세에 뇌졸중으로 오른쪽이 마비되셨어요. 처음 3년 동안은 완전히 대소변을 받아 낼 정도였지요. 차고를 비워서 거기서 걸음 연습을 했습니다. 어느 정도 거동하시게 된 다음부터는 왼손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꼬박 19년, 긴 투병 생활 끝에 선생은 별이 되었다. 이정자 여사는 남편과 오랫동안 함께살던 부산 그의 집에서 조용한 노년을 살고 있다.

집안 살림은 아내에게 다 맡겨놓았던 빵점짜리 남편이지만, 때때로 ‘이성운’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찾아오는 제자들이나 기자들을 만나면 새삼 남편의 삶을 존경하게 된다. 가신 지 5년이나 되었지만, 아직 선생의 작업실에는 그리다 만 작품들이 주인의 손을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편집자 주 – 욕지도 이중섭의 흔적을 찾다가 만나게 된 이성운 선생은 아깝게도 2017년 작고하셨다. 지금이 아니라면 사모님의 증언마저 들을 수 없겠기에, 부산에 사시는 사모님을 만나 이성운 선생의 발자취를 남겨 둔다.

신문마다 이성운 선생의 전시회가 대서특필됐다
신문마다 이성운 선생의 전시회가 대서특필됐다
이성운 선생의 작품
이성운 선생의 작품
이성운 선생의 작품
이성운 선생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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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자 여사가 남편의 유작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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