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극복할 것이며 나에게 주어진 이 3년의 배움을 통해 결단코 내가 자랄 때 황무지 같은 우리나라의 음악계에서 하던 그 고생을 나의 후배들에게는 시키지 않으리라고 조국의 하늘을 두고 맹세하였소.”
선생의 유학 목적은 세계적인 작곡가가 되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음악의 본토에서 치열하게 공부하고 돌아와, 이 땅의 황량한 음악의 대지를 풍성하게 가꿀 밑거름이 되는 것이 목적이었다.
도쿄, 홍콩, 이스탄불을 경유해 2주일 걸려 1956년 6월에 도착한 프랑스 파리. 국립음악원에 적을 두고 보낸 1년의 수학 기간은 탐색과 고통의 시간이었다. 토니 오뱅, 피에르 르벨 등의 지도를 받으면서 자신이 열어야 할 음악의 문을 더듬어야 했고, 부족한 유학비와 높은 물가로 인해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이국 생활의 외로움과 고통은 자연스럽게 아내를 향한 그리움과 고향에 대한 향수로 전이되었는데, 선생은 그 바쁜 적응과 수학의 시절에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일주일에 여섯 번 편지를 보냈다.
“나는 통영의 앞바다 멀리 떨어져 있는 섬에다 조그마한 집을 사든지 짓든지 해두고, 일 년에 두 번은 그곳에 가서 살겠소. 그때에는 당신도 가요. 가서 같이 고기를 낚고 당신은 나의 밥을 해주고 우리는 조그마한 발동선을 사서 섬의 골짝 골짝을 타고 다닙시다.”
개인사를 해결하기에도 벅찼던 프랑스 시절에 이색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파리 한인회 회장을 맡은 것이다. “빠리 교우지”를 창간해, 교민들의 소식과 조국의 소식을 일일이 자신의 손으로 써서 소식지로 만들었는데, 선생의 공동체 지향적 DNA가 아니면, 이런 활동을 설명하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