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시절 1954
성북동 시절 (1954년)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선생은 식솔들을 이끌고 서울 성북동에 새 보금자리를 꾸몄다. 부인의 오빠가 결혼 선물로 사준 피아노를 팔고 빚을 얻어 산 한옥 한 채.

선생의 집 길 건너에 당대의 석학이자 시인, 고려대 교수 조지훈이 살고 있었다. 선생과 조지훈은 보자마자 심우(心友)가 되었다. 호주가(好酒家)였던 조지훈과 벗들은 통금 시간인 자정 직전에 선생의 한옥으로 들이닥치곤 했는데, 부인이 끓여주는 콩나물국과 탁주를 마시면서 인생과 예술을 논했다. 이 시절에 태어난 것이 조지훈 작사 윤이상 작곡, 고려대학교 교가이다.

1953년 성북동에 입주한 때부터 1956년 선생이 프랑스 유학을 떠날 때까지, 성북동 시절은 선생 부부의 인생에서 가장 따뜻하고 생기 넘치는 시절이었다. 젊은 부부는 성북동 골짜기를 매일 저녁 산책하면서 자연을 누렸고, 아이들을 재워 놓고 돈암동 영화관을 드나들었다.

이 낭만의 시절에도 폐결핵과 어려운 경제는 늘 선생을 따라다녔다. 건강 문제로 양정고등학교를 사직한 선생은 생활을 위해 여러 대학에 강사로 나갔고 신문에 많은 논설과 칼럼을 썼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생활을 위한 이 분주한 시기에, 선생이 상상한 적도 없는 먼 대륙으로 떠나야 할 어떤 ‘운명’이 선생도 부인도 모르는 사이에 다가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새해는 나에게 실로 중대한 의의를 가져오는 해이다. 인생의 생애를 반으로 꺾어 전반은 휴지로 돌리고 후반은 충실한 열매로만 장식하기 위해 비장한 결심으로 재출발하는 해이다.”

낭만과 가난, 마흔이 다가오는 나이와 실현하고 싶은 음악가로서의 이상(理想)이 뒤섞인 성북동 시절 후반에 선생이 쓴 글이다. 놀랍게도, 선생도 모르게 이미 눈앞에 다가온 새 시간에 대한 예언이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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