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작곡가들과(1950년). 앞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윤이상.

신혼집은 신랑이 자취하고 있었던 학교 사택이었다. 적산가옥이었는데, 오래 불을 때지 않은 얼음 방에 군불을 넣으면서 신혼이 시작되었다. 부엌일은 초보였고 신랑의 월급으로는 2주 생활비도 되지 않았지만, 신부는 신랑의 건강을 위해 뱀장어를 장복하게 했고 자다가도 일어나 체온을 점검했다. 신혼 다음 달에 태기가 있었는데, 사과 한 개도 사 먹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가난 중에서도 환했던 신혼 시절이 얼마 가기도 전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학교가 휴교하는 바람에 신랑의 월급이 끊어져, 신부는 결혼반지를 팔았고 신랑은 일제 강점기 때 도피 생활에서도 버리지 않았던 자신의 분신, 첼로를 팔아야 했다.

이 간난의 한복판에서 산기(産期)가 다가왔다. 온돌방은 차가웠고, 정전까지 되어 버렸다. 촛불을 켜려고 해도 초를 살 돈이 없어, 이웃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신랑은 어두운 방에서 두려움과 슬픔에 떨고 있는 신부를 꼭 껴안았다. “여보, 울지 말아요. 당신이 우리 아기 낳으면 내가 탯줄 끊고, 미역국이며 밥이며 부족한 것 없이 다 할 테니 조금도 걱정 말아요.”

소식을 들은 신부의 어머니가 다음 날 산파를 데리고 급히 왔고, 그때까지 태중에서 기다리고 있던 딸이 웃음과 생기가 넘치는 방에서 태어났다. 이름을 정(汀)으로 지었다. 조용하고 깨끗한 물가라는 뜻.

딸이 태어나자, 전쟁으로 마비되었던 관청과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다. 신랑은 다시 부산사범학교에 복직했고, 전시작곡가협회 사무국장을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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