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 선생과 오른쪽이 선생의 친구 이상용(1946년)

1939년 화양학원 교사 시절의 어느 날, 선생은 이케노우치 도모지로라는 이름을 신문에서 발견했다. 그가 파리국립고등음악원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성공적인 연주회를 개최했다는 기사를 읽은 선생은 그를 찾아 도쿄로 건너갔다.

아르바이트로 생활비와 교습비를 벌어가며 그의 문하에서 약 2년간 공부하던 중,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공부를 중단하고, 친구들과 도쿄 교외 무사시노 숲에 모여 조국 해방을 위해 헌신하자는 맹세를 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비밀결사를 만들어 무인도에서 폭탄 제조를 연구하는 등 항일을 모색하던 선생은 징용이 되어 미곡 창고에 배치되었는데, 1944년 7월에 갑자기 체포되었다. 선생을 주시하던 일본 경찰이 가택 수색을 한 결과 한국어로 된 가곡이 발견되었던 것.

불령선인으로 지목되어 2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나와, 다시 징용이 되어 다른 미곡 창고에서 일하던 어느 밤, 일본 헌병대에 근무하는 옛 제자가 다급하게 선생을 찾아왔다. “선생님, 신변이 위태로우니 빨리 피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일 아침에 체포될 것입니다.”

분신인 첼로를 메고 도주하여 서울에 도착한 선생은 해방이 될 때까지 일경의 눈을 피해 도피해야 했다. 도피 생활은 험난했다. 무엇보다 신분증을 보여주지 않으면 밥을 사 먹을 수 없는 통제의 시절이라, 선생의 몸은 나날이 쇠약해져 갔다. 고민 끝에 고향의 면사무소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부탁하여 가짜 신분증을 얻어 겨우 허기를 면할 수 있었는데, 그 친구가 이상용이다.

일제 강점기 때 선생의 고단한 도피 생활을 도운 이상용은 동베를린 사건으로 납치되어 극한의 고초를 겪었던 험한 시절에도 선생을 위문했다. “수일 전에 친구 상용이가 한약 한 제와 마른 새우와 김, 성게알 젓, 마른 꽁치 등 한 보따리를 보내 주어서 지금 그것을 잘 먹고 있소. 상용이는 참 고마운 친구….” 당시 선생이 부인에게 보낸 옥중 편지의 한 부분이다.

이중도(시인, 통영국제음악재단 팀장)

저작권자 © 통영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